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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ntimental Vagabond Oct 27. 2021

관찰하다

beobachten


관찰하다 : 사물이나 현상을 주의하여 자세히 살펴보다.


외국어를 배우다 보면 어떤 단어들을 새롭게 접했을 때 소울메이트를 만난마냥 신이 날 때가 있다. 교환학생으로 독일어를 몸으로 부딪혀 배울 때 습득한 fernweh나 beobachten 같은 단어들이 그랬다.


fernweh(페른베)는 fern, 즉 먼 곳을 향한 아픔과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하는 단어로 homesick과는 반대되는 단어였다. 내 모국어인 국어에 존재하지 않는 이 단어를 처음 만났을 때는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소울메이트를 만난 것만 같았다. 항상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는 나의 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해 주는 fernweh는 독일어 단어 중 다섯 손가락에 꼽히게 좋아하는 단어가 되었다.  

    

또 다른 단어는 beobachte(베오밬텐)이었다. 관찰하다, 주시하다는 뜻의 단어인데 어딘가에 자리를 틀고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주변을 한참 동안 구경하는 내 취미생활에 제대로 된 이름을 붙여준 것만 같은 단어였다. 한국말로 '관찰하기'라고 하면 뭔가 모르게 어감이 이상한데, beobachten이라고 하니 테니스, 요가처럼 어떤 고유명사의 취미가 된 것만 같았다.


이 단어를 알고부터는 교환학생 당시 가장 친했던 미국인 친구 로라와 매일매일 beobachten이라 이름 붙인 취미생활을 즐기는 시간을 보냈다. 우리 오늘 수업 마치고 공원에 가서 베오밬텐할까? 하고선 공원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고, 자연 풍경을 관찰하고, 하늘이 어두워지는 과정을 몇 시간이고 함께 즐기며 얘기를 나누곤 했었다. 주말엔 독일의 다른 도시에 함께 여행을 가서도 광장이나 기차역에 앉아서 몇 시간이고 함께 beobachten 하는 시간을 보냈다.


beobachten 취미는 대략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됐었던 것 같다. 친구랑 야간 자율학습을 몰래 빠지고 사람들이 내려다보이는 시내 롯데리아 2층에 앉아 몇 시간이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친구와 얘기를 나눴었다. 사람들의 생김새나 옷차림에서 시작해서, 우리는 어떤 얼굴을 한 사람이고 싶은지, 어떤 모습의 어른이 되고 싶은지, 어디에 살고 싶은지 등등 외부를 통해 시작된 질문은 항상 우리 내부를 향해 돌아왔었다.


beobachten 취미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때가 있었는데, 2008년 영국에서 지낼 때였다. 카메라가 내장된 핸드폰이나 디지털카메라가 흔해지기 전이었기도 했고, 내가 관찰한 것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기도 해서 시티 드로잉 클래스에 참여하게 되었다. 대영박물관, 빅벤 같은 런던의 명소에 모여 드로잉을 함께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클래스였다. 자주 다니고 눈에 익던 명소들이었지만 몇 시간 동안 앉아 beobachten 하며 스케치북에 그리는 동안, 보지 못했었던 새로운 디테일들을 발견을 할 수 있었다. 이런 시간을 통해 관찰은 발견을 동반하고 그 발견은 자주 삶의 기쁨으로 찾아온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 삶의 기쁨이었던 beobachten을 어느 순간 멈추게 되었다. 언제, 어떻게, 왜 멈추게 되었을까?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하는 일들이 더 많아지게 되면서, 무언가를 오랫동안 관찰하는 시간은 사치와도 같아져 버렸다. 경제적인 활동을 하고 시간에 쫓기는 삶이 시작되며,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남는 시간마저도 항상 더 생산적인 일과 더 나아지고 성장하기 위한데 시간을 쓰느라 beobachten을 하는 시간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어느 순간부터 항상 내 손에 카메라가 들려있기 시작하면서부터, beobachten과 더 멀어지게 되었다. 중요한 순간, 아름다운 순간,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 수많은 beobachten의 순간엔 찰나와 같은 사진 찍기 활동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남는 건 사진밖에 없어'라고 하며 찍기 시작한 사진들이 어느새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수가 1만 장이 넘게 되었다.


인스타그램을 시작하며 이 증상은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었다. 팔로워라고 하는 사람들이 생기면서는, 내가 간직하고 싶은 순간마저도 나의 시선이 아닌 팔로워들의 시선에서 어떻게 보일까라고 하며 찍기 시작하게 되었다. 모든 순간들이 다 그랬던 건 아니지만, 아주 많은 순간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 그렇게 돼버렸다.   


며칠 전 남산을 걷고 있었다. 파란 하늘과 포근한 햇빛 아래 길 양가로 늘어진 은행나무들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해 너무나도 아름다운 가을날이었다. 그 순간도 무의식적으로 습관처럼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 문뜩 대체 내가 왜 사진을 찍었을까?라는 의문이 들며 beobachten이 나에게서 사라졌음을 처음으로 알아차리게 되었다. 아니, 어쩌면 이제는 beobachten이 다시 필요해졌음을 알아차렸다는 표현이 맞을 수도 있겠다. 바쁜 일 없이 여유가 있는 아름다운 가을날, 남산을 걷고 있는 나에게 필요한 것은 언제 다시 꺼내볼지도 모르는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닌, 따뜻한 햇빛을 마음껏 느끼고 천천히 가을이 오는 모습을 관찰하고 느끼는 것이었다.


결국 인스타그램을 비활성화하는 극약처방을 내렸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있을 때는 가장 젊은 날의 그 얼굴과 표정을 더 눈에 담고 살피고 싶고, 세상의 더 작은 아름다움 들을 관찰하고, 눈에 잘 닿지 않는 외진 곳들도 더 살펴보고 싶어졌다. beobachten이 취미였던 그때처럼, 단순히 스크린을 보는 시간보다 관찰하고 발견하는 시간이 길어지길 바란다.


인스타그램을 비활성화하고 스크린 타임 막대그래프가 반토막으로 줄어들었다. 줄어막대그래프의 시간들이 관찰과 발견, 기쁨의 시간들로 치환되길 바라며 오늘은 남산길을 지날  핸드폰은 고이 누워두고,  가을을 찬찬히 beobachten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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