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회피형과의 이별 이야기
그 남자를 만나기 전까진 이별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물론 이별하고 나면 많이 슬펐고 오래 그리워하기도 했지만, 상대방이 비상식적인 잘못을 하면 끊어내는 것에 가차 없었다. 나는 내가 이성적이고 현실적으로 생각하는 똑부러진 사람인 줄 알았다.
스물일곱, 그를 만나기 전까지.
내 이상형은 지적이고 어른스럽고 생각이 깊으며 이성적이고 나에게만 따뜻한 고양이 같은 남자였다. 더하여 EQ가 높아 약자에게 이타심이 있고 동물을 아끼며, 여유가 있다면 기부도 할 줄 아는 남자가 좋았다.
반대로 그는 어리고 순수하고 해맑았으며 감정적이고 자아성찰 같은 건 할 줄 몰랐고 내가 아닌 모두에게 다정한 리트리버 같은 회피형 남자였다. 종종 도덕적 관념이 일반적이지 못하다 느꼈으며, 가끔 소시오패스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 그가 내 마음속으로 뛰어들어와 아주 단단히 뿌리내렸다.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그가 가진 것 중 내가 좋아하는 포인트는 다정하다는 것, 그리고 외모가 제법 내 취향이라는 것뿐인데도 나는 그를 내 생애 만난 남자들 중 가장 사랑했다.
남들보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사랑에 단단히 빠져버린 나는 감정적으로 굴고,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못했으며, 현실감각을 잃어버렸다.
그가 아무리 내게 상처를 주어도 그의 대단치 않은 말 몇 마디에 그를 용서할 마음이 들었고, 그가 나에게 사과하지 않아도 내가 잘못했다며 그를 붙잡았다.
그 시기엔 나를 상처 내는 그가 경계심 가득한 짐승을 보는 것만 같아 내가 구원해주고 싶었다.
나는 단단히 착각을 했다. 그는 짐승이 아닌 사람이다. 짐승은 지능이 모자라기에, 사람과 의사소통이 되지 않기에 사람을 상처 입힐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충분한 지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와 말이 통하는 인간이었다. 그는 상처 입은 짐승이 아닌 타인을 상처 입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를 만나며 책임감을 갖지 않았고, 수 없이 지키지 못할 약속을 했으며, 어긋난 도덕적 관념으로 나를 상처 입혔다.
그와 만나며 5번의 이별을 했다. 그중 한 이별 이야기다.
그는 어긋난 도덕적 관념으로 나를 상처 입히고 나를 버려두고 떠나갔다. 그가 입힌 상처임에도 내가 버틸 수 없이 힘이 들어 헤어진 지 일주일 만에 연락했을 때, 그는 오히려 내가 나쁜 사람이라며 비난하며 나를 즈려밟았다.
그는 나와 만나며 나에 대한 불만을 말하지 않은 채 혼자 속으로 쌓아두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부정적인 시각으로 충분히 왜곡됐을 때의 나는 희대의 악녀쯤으로 이미 그의 머리에서 합리화가 끝나있었다.
피해자는 나인데도 불구하고 나에 대해 제멋대로 곡해하여 해석한 비난을 받고 있자니 황당해서 오히려 감정이 정리되었다. 그는 사람이 아니라 미친 개였다.
짐승과 대화를 시도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던 내가 그의 카톡을 무시하자 그는 수일이 지나 다시 장문의 카톡으로 나를 비난하였다.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우리가 같은 회사가 아니었더라면 좋았을걸. 더 빨리 인연이 끝났을 텐데. 당시 같은 회사에 다니던 나는 그와 대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그래. 서로 오해는 풀고 헤어지자.
내가 잘못한 부분도 있네. 그건 사과할게.
근데 이건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
5살짜리 어린아이를 달랜다고 생각하니 수월했다.
그래도 이걸로 다 끝난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재회를 원하기 전까지는.
그는 자기 주변 친구와 엄마에게 상담을 받았다고 했다.
다들 그가 잘못한 거라고 말해줬다고 했다. 미안하다고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자존감이 너무 낮아서 그랬다고. 옆에 있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사랑에 눈이 멀면 사람이 미친 짓을 하곤 한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주변에서 그가 잘못한 거라고 말해줬다'에 초점을 맞췄어야 했는데, 나는 '자존감이 너무 낮아서 그랬으니 고치겠다. 기회를 달라.'는 말에 초점을 두었다.
그는 누가 봐도 도덕적 관념이 박살난 수준의 잘못을 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스스로 깨닫지 못했다. 내가 힘들다고 발악을 하는데도 그가 힘든 것 외에는 그의 안중에 없었으며 오히려 나를 비난했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 주변의 의견을 듣고 나서야 잘못한 거구나 알게 되었다.
과연 그가 잘못한 거라고 깨달은 걸까?
아니면 모두가 그의 잘못이라고 하니까 다수결에 따라 인정한 걸까.
그때도 그가 소시오패스 같다고 생각은 했었다.
답답하게도 나는 그를 너무 사랑해서 그가 소시오패스 같다는 생각은 묻어둔 채, 변할 테니 기회를 달라는 말에 속절없이 그를 용서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그는 그 일이 있고 나서 1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공포회피형 애착유형을 고치지 못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그는 상처 입은 짐승이 아닌 멀쩡한 성인 남성이었으니.
그저 사랑에 눈이 멀어 멀쩡한 성인 남성을 가엾은 상처 입은 짐승으로 본 나 스스로를 원망하는 수밖에.
내가 그와 처음 만날 때 그는 3년 뒤쯤 결혼하고 싶다고 얘기했다. 2년을 만나고 그에게 결혼을 묻자 그는 다시 이렇게 대답했다.
"2~3년 뒤쯤 하게 되지 않을까?"
나는 결혼 적령기의 여성이었고, 예정된 자궁수술로 인해 출산 계획이 늦어지면 곤란한 상황이었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일정이 뒤로 밀리게 되더라도 적어도 그가 나와 함께 미래 계획을 세우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미래 계획과 책임을 묻자, 그는 이 말과 함께 이별을 고했다.
"지금의 나는 너를 책임질 자신이 없다."
그의 장문의 이별 카톡에 나는 "그래" 두 글자로 그와의 인연을 마무리했다. 헤어진 지 세 달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궁금은 하다. '지금'의 그가 나를 책임일 자신이 없다는 게 정확히 무슨 의미였을지. 그의 무엇이 부족했는지, 혹은 나의 무엇이 부족했는지, 사랑이 다한건지.
하지만 세 달 전에도 나는 알았다.
결혼 후에 수많은 시련과 고통이 찾아올 텐데, 어떠한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나를 책일질 수 있는 남자와는 결혼하면 안 된다는 것을.
몸이 아파 직장도 관둔 채 수술을 앞두고 있는 나를 버리고 가는 남자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몸이 아픈 연인을 두고 떠나간 사람에 대해 이해해보고자 하니 한 가지 답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건 사랑이 없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 이별에 대해 더는 묻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가 떠난 후 나는 빠른 속도로 건강이 악화됐다.
수술이 끝나면 다 괜찮아지겠지라는 생각이 무색하게 수술이 끝나고도 나는 괜찮지 않았다.
수술 후 암이 의심되어 2주간 불안 속에 살아야 했고, 조직검사 결과 암이 아니라는 소견이 나온 뒤에는 급성 위궤양으로 응급실에 실려갔다. 수술을 받은 한 달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도 나는 하루도 잘 날 없이 아프기만 하다.
너무 아파서 그에 대한 마음이 지워졌다.
그를 원망하는 수많은 시간들이 있었다. 이렇게 아픈 내 곁에 왜 있어주지 않았는지, 그래서 무거운 짐 같던 내가 사라져서 인생이 좀 살만 해졌는지. 부질없던 원망들은 큰 고통 앞에 속절없이 사라져 갔다.
우산이 없는데 비가 오면 어떻게 비를 안 맞을 수 있을까 하며 스트레스받지 말고, 그냥 냅다 맞아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삶에 고난이 찾아올 때 회피하지 말고 정면돌파 해보라는.
나는 우산 없이 태풍을 견뎠다.
아주 아프고 비참한 시간이었다. 비가 오는 날 우산 없이 비 맞는 일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던데, 우산 없이 태풍을 견디는 일은 어떻게 생각해도 좋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오히려 그 시간이 나빴기에 많은 것들이 정리가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비가 오고 있지만 태풍이 끝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강한 태풍이 온 거리는 많은 것들이 휩쓸려 사라지고 부서지고 무너지고 황폐하다. 하지만 태풍이 지나간 마을에는 새롭게 복원이 시작된다.
나는 태풍이 온전히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기존에 내가 꾸려놓았던 마을은 불편하고 힘든 것들이 많았다. 태풍이 지나고 나면 새로워진 터를 정리하고 다시 작은 씨앗들을 심을 것이다. 모두 다 정리해서 같은 실수 없이 새롭고 더 행복한 마을을 만들고 말 것이다.
회피형과 안정적으로 만나는 법을 찾아본 적이 있나요?
1. 회피형은 책임을 두려워하니 책임을 부추기지 마세요.
상대는 연애라는 책임의 무게가 있는 관계를 하면서도 책임지지 않을 겁니다. 힘든 순간에 당신을 가장 먼저 버리고 갈 거예요.
2. 그에게 시간을 충분히 주세요. 재촉하지 마세요.
상대를 만나기 위해 당신은 인내하다 못해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불안하고 답답한 마음을 눌러 담은 채 그의 시간을 기다리다가 혼자서만 초라하게 상대방을 맞춰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겁니다.
3. 독립적인 사람임을 보여주세요. 상대 없이 독립적으로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세요.
연애라는 건 기본적으로 '함께'가 기본인데, 회피형들에게 그 기본은 통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물리적인 시간에 대해서만 독립적인 것이 아닙니다. 당신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들도 혼자 독립적으로 결정한 뒤 통보할 거예요. 그들은 대화를 원하지 않습니다. 혼자 판단하고 결론짓습니다.
4. 미래 계획보다 현재에 집중하세요.
상대는 당신과의 미래를 절대 계획하지 않을 겁니다. 결혼에 대해 생각하다가도 결혼이 매끄럽게 그려지지 않고 장애물이 등장하면 생각하길 회피합니다. 단 하나의 장애물도 없이 결혼에 골인하는 신혼부부를 본 적이 있나요?
당신이 이 모든 상황을 인내할 수 있을 만큼 그를 사랑한다면, 그가 평생 변하지 않아도 괜찮다면 그와 함께하셔도 좋습니다. 그가 책임질 자신이 생길 때까지 얼마든지 기다릴 마음이 있으시다면 문제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가 언젠간 변할 거라고 믿으며 인내하며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면, 그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시길 권장드립니다. 저 역시 그와의 관계가 끝나고 나서 무너질 제가 두려웠으나, 생각보다 빨리 마음이 정리되었고 헤어져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나 스스로가 강한 사람이라고, 이겨낼 수 있다고 믿어주세요.
두 번째 재회에서 제가 사랑했던 그 남자는 자신이 잘못했다며 돌아와 재회를 청할 때 변하겠다고 노력하겠다고 저에게 약속했습니다. 저는 그가 변하는 걸 보고 나서 다시 만나겠다고 했지만, 그는 기어코 변하겠다며 저를 설득시켜 다시 재회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또다시 회피문제로 불화가 생기자 그는 그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 줄 수 없냐며 저를 탓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변하겠다고 스스로 깨우치기 전까지 변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변하겠다, 노력하겠다 하는 말은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저 그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허언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상대를 사랑해 마지않는다면,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사랑할 자신이 있다면 그 마음이 다 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어쩌면 저도 제가 해볼 수 있었던 모든 것을 다 해봤기에 미련이 털어졌던 것도 같습니다.
이 정도로 고통스러웠기에 저는 다시는 회피형을 만나지 않을 것이고, 타인을 고치고 구원할 오만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또한 저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한 인연이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