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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외로미 Jun 22. 2020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 - 예의와 배려

소공녀(2020) 3호

"언니,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시죠?"

"** 씨~ 너무 오랜만이에요! 전 별일 없이 지내요. 너무 반가워요. 잘 지내시나요?"

"잘 지낸다고 해야 되죠? 아니요ㅠㅠ 저 코로나 때문에 너무 힘들어요. 그래서 카톡 보다가 언니 생각나서 연락해 봤어요!"


무려 3년 만에 보낸 카톡에 언니는 무척이나 반가워해줬다. (대화를 그대로 복기하지 않았지만 언니는 반가운 마음에 오타도 났다.) 언니를 마지막으로 본 건 2017년 여름에서 가을 사이. 언니는 미대를 나왔고 종종 언니의 전시회에 초대해 줬다. 미술관에 가는 걸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언니의 그림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동물보다 식물을 좋아하는 편인데 언니는 주로 나무를 그렸고 언니만의 특유의 기법으로 완성한 그림에는 언니의 선함이 담겨 있었다. 언니가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한 이후에 좀처럼 자주 보기는 힘들었지만 잊지 않고 전해주는 전시 소식에 언니의 그림을 보러 갔던 기억이 있다.


언니는 영어 스터디에서 처음 만났다. 교직원으로 근무할 당시 본의 아니게 교환학생 업무와 외국인 교수 지원 등의 국제 교류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서류 통과를 위해 토익 고득점을 마련했고 대학생 때 어학연수 1년을 다녀온 것을 제외하고는 영어에 능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소개서를 잘 꾸며낸 탓인지 영어를 많이 사용하는 부서에 배정되었다. 한국어보다 영어로 이메일을 쓰는 경우가 많았고 종종 외국에서 오는 전화도 받아야 했기 때문에 먹고살기 위해 시작한 스터디였다. 사실 우리는 스터디 후에 맛집에 가거나 맥주 한 잔을 하는 등 다른 것을 더 열심히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스터디 덕분에 영어를 까먹지 않고 사용할 수 있어서 좋았다. 무엇보다 그곳에서 언니를 만났고 그 인연을 이어온 지 10년이 되어서 더 감사함을 느낀다.


언니는 한국에서 가장 좋은 미대를 졸업했고 해외에서 유학까지 한 인재이다. 하지만 한 번도 9to6로 일해본 적이 없고 정규직이었던 적도 없다. 미술학원에서 강사를 하거나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는 것으로 수익을 얻었고 가끔 전시회에서 그림을 판매하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능력에 비해 굉장히 불안정한 삶을 살았다. 프리랜서로서는 나보다 훨씬 선배였다. 언니의 모토는 조금 일하고 조금 버는 것이었고 특별히 물욕이 있거나 사치를 하는 성향이 아니었기에 언니의 삶은 꽤나 만족스러워 보였다. 혼자 만의 시간도 좋아해서 결혼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고 했고 결혼을 한다면 35살 이후에 아주 늦게 하고 싶다고 했다. 언니의 바람대로 언니는 35살에 지금의 남편을 만난 후 결혼했다. 


어떻게 보면 언니는 나와 반대의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다. 안정성을 추구하는 나에 비해 언니는 불안정성을 즐기며 자유를 추구했고 꼭 결혼을 하고 싶어 하는 나와 달리 혼자 살아도 상관없다는 주의였으니까. 그럼에도 언니와 나는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말을 쉽게 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 언니를 처음 봤을 때 예의상 그리고 한국 특유의 문화 때문에 "언니, 말 편하게 하세요."라고 했고 "아, 제가 말을 잘 못 놓아요. 전 존댓말이 편해요." 이런 식으로 답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10년째 언니는 나에게 극존칭을 사용하고 있다. 


나도 20대 중반 이후,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는 쉽게 말을 놓지 못하고 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언어가 가진 힘을 체감해서 그런 것 같다. 사람에게 가장 상처를 주는 것은 칼이나 총이 아닌 말이라는 것을 직접 경험해서일까. 나도 누군가가 말을 놓자거나 편하게 하라고 하면 존댓말이 더 편하다고 한다. 결코 상대방을 불편하게 여기거나 불편하게 만들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내가 친해지고 싶고 친하다고 느끼는 사람일수록 상처를 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최대한 예쁘게 가다듬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 있는 것이다. 존댓말은 최소한의 안전장치인 셈이다. 그래서 나이와 지위를 막론하고 나는 절대 먼저 말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나이나 지위를 앞세워 말을 놓는 사람을 무척 싫어한다. 물론 상대방이 너무 불편하다고 하면 그 뜻을 존중하기 위해 고집을 굽히는 편이다. 서로 말을 놓는 방향으로.


언니는 아이를 키우고 있어서 차마 재워달라고 할 수는 없었고 오랜만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우린 각자 3호선의 끝과 끝에 살고 있어서 약속 장소를 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보통 내가 서울에 살고 있지 않고 기혼인 친구들이 훨씬 바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친구 집 근처까지 가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이런 일이 당연시되고 나중에 나의 배려가 배려되지 않을 때는 마음이 조금 언짢아졌다. 모두가 바쁜 세상에 서로의 편의를 추구하다 보면 만남 자체가 성사되기 어려운 적도 많았다. 우리는 서로를 배려해서 더 가겠다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3호선의 중간 지점에서 만나게 되었다. "언니, 제가 언니 쪽으로 가도 되는데 고마워요." 사소한 것도 배려하는 언니에게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우리는 식당 오픈 시간에 맞춰 만나기로 했고 직장인들의 점심시간에 맞물리면 복잡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약속 시간보다 일찍 가서 식당 앞에서 기다릴 생각으로 여유 있게 나왔다.  하지만 길치여서 길을 헤맨 후 5분 정도 전에 식당 앞에 도착했는데 언니는 나보다 먼저 와 있었다. 

"앗, 언니 제가 먼저 와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아, 괜찮아요. 저도 방금 왔어요. 오랜만에 나온 김에 근처에서 전시 봤어요."

언니도 나와 같은 생각으로 일찍 왔는지 모르겠지만 다시 한 번 언니의 배려가 고마웠다. 약속 시간을 지키는 것은 매우 기본적인 일임에도 생각보다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요즘 들어 더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상대방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고 느끼는 나로선 이런 언니의 작은 배려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면서 3년의 여백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3년 전에는 아기였던 언니의 아이는 이제 말을 하고 유치원을 다니면서 그만큼 언니에게 여유의 시간이 생긴 듯했다. 아직 전시를 할 만큼의 작품을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요즘은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늘 불안정한 삶을 살아온 언니가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고 꽤 편안해 보여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는 나의 자유를, 나는 언니의 안정감을 부러워했지만 결국 인간은 누구나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라고 결론을 짓게 되었다. 언니는 원래 자신을 과시하거나 자랑하는 스타일이 아니지만 몇 가지 일상적인 에피소드만 들어봐도 언니의 배우자는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자신과 잘 맞는 짝꿍을 찾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기 때문에 그 어려운 일을 해낸 언니가 정말 부럽고 대단하게 느껴졌다.  


다음의 만남은 언니의 전시회 혹은 언니네 집들이 정도로 막연하게 정했다. 아직 충분히 작품이 완성되지 않았고 입주 날짜도 많이 남았으니 아마도 오늘의 만남처럼 먼 훗날이 될 가능성이 많다. 하지만 그럼에도 언제 봐도 반갑고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관계에 있어 기본이 예의와 배려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언니가 그런 기본이 된 사람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나도 그런 언니에게 예의를 갖추고 배려할 것이기 때문에 계속 이런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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