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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외로미 Aug 17. 2020

최악의 직장, 최고의 파트너

소공녀(2020) 4호 

대학원에 가기 전에 일했던 학교는 다소 기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학교에서 신입생 전원이 듣는 강의를 관리하고 있었고 내 일을 도와주는 인턴 두 명이 있었다. 어느 회사나 그러하듯 인턴의 업무는 책임이 따르거나 크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인턴은 1년 계약직이었고 무기계약직이나 정규직 전환이 될 수 없었는데 특이한 점은 이 자리는 이 학교의 졸업생만 지원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학교에서는 인턴에게 4대보험을 가입시켜 주는데 이 4대보험으로 학교의 취업률을 산정하기 때문에 학교 입장에서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는 지표였다. 학생 입장에서는 좋은 자리를 찾기까지 토익 공부를 하거나 지원서를 쓰는 등 취업 준비도 하면서 적당히 일하고 돈도 벌 수 있었다. 이 제도는 어느 정도 학교와 졸업생에게 득이 되는 셈이었다.


하지만 이 학교의 정규직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나에게는 굉장히 불합리한 제도였다. 이 시스템이 매우 정상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인턴은 이 곳을 직장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은 듯했다. 매일 지각을 하고 무단결근을 하며 업무 시간에 자리를 지키지 않는 일도 빈번했다. 어차피 열심히 해도 떠나야 할 자리이기 때문에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근무를 엉망으로 하는 것도 화가 났지만 마무리가 엉망일 때는 더 화가 났다. 최소한 다른 사람을 채용할 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 하는데도 하루나 이틀 전에 갑자기 나오지 않는다고 할 때는 그 업무의 공백을 메워야 하는 사람은 남겨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인턴이 하는 일이 아주 어렵지 않더라도 최소한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상황은 알고 있어야 했고 일의 연속성을 위해서는 한 학기 이상 꾸준히 일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새로 사람이 올 때마다 업무를 설명해주고 일에 적응하기도 전에 다시 그만두는 일이 되풀이되자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 제도가 바뀔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이 조직에 있는 한 이 답답함을 어디에도 호소할 수 없었다.


인턴 때문에 속이 상할 일이 참 많았지만 그래도 나와 가장 오래 일했고 일을 참 잘해서 지금도 연락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아니, 그 직장에서 만난 동기하고도 지금은 연락하고 있지 않으니 유일하게 연락하는 전 직장동료이다. 그녀는 조용한 편이지만 아싸는 아니어서 나뿐만 아니라 모든 직원들과 잘 지냈고 업무에 대한 적응력도 빨랐다. 부탁을 하지 않아도 일을 잘 찾아서 해냈고 작은 실수조차 하지 않고 꼼꼼하게 일 처리를 잘했다. 인턴의 업무 중에는 행정 업무 외에도 외부 손님이 오면 차를 내오거나 다과를 준비하는 업무들도 있었다. 탕비실에 차를 준비하러 들어가면서 그녀가 탕비실에 있는 거울을 닦는 것을 종종 목격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잘 찾아서 하는 사람이었다. 스펙과 일처리 능력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녀보다 토익점수나 학점이 높은 다른 인턴이 일을 더 잘하거나 책임감이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가능한 그녀와 오래 일하고 싶었는데 고맙게도 그녀는 내가 퇴직하기 전까지 일을 함께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녀가 다른 인턴들처럼 좋은 직장을 찾기를 간절하게 바랐지만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떠나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 조직을 떠나면서 업무 연락을 받고 싶지 않아 상세한 매뉴얼을 남기고 왔다. 나는 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했고 애정이 없는 조직이었기 때문에 대학원을 가면서 전화번호를 바꿨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번호를 두 개 사용해서 새로운 번호로 카카오톡에 가입했다.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카카오톡용 전화번호를 그녀에게는 알려줬다. 학교를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 내 후임으로 온 정규직 직원이 휴직을 하면서 그녀의 계약이 연장되고 그녀가 내 업무를 고스란히 받게 되었다고 들었다. 매우 이례적인 케이스이긴 하지만 학교에서는 다른 사람을 뽑을 여력이 되지 않았고 일이나 인성이나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내린 결단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차피 그녀가 정규직으로 전환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안타까웠다.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워낙 센스가 있어서 업무에 관해서는 거의 연락을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았다. 결국 내 예상대로 그녀는 임기가 끝나고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내가 대학원을 졸업하고 바로 직장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을 때 그녀는 새로운 직장을 찾았다. 그녀의 새 직장은 크게 힘들거나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고 했지만 정규직은 아니었다. 보수가 적지는 않았지만 위촉직이어서 일급으로 계산이 되어서 공휴일에는 일급을 받지 못했고 고용보험이나 퇴직금과 같은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매사에 불만을 가지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새로 하는 업무에도 빠르게 적응하면서 잘 지내는 것 같았다. 사실 그녀의 사정도 그렇게 좋지 않았음에도 오히려 나의 상황을 이해해 주고 나중에 취업하면 맛있는 걸 사달라며 맥주를 사주는 그녀가 참 고마웠다. 학교에서 일할 때도 항상 고마웠는데 그녀의 세심한 배려와 따뜻함이 이 고마운 인연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게 만드는 것 같다. 


오랜만에 다시 그녀에게 연락을 해서 약속을 잡았다. 약속 장소를 정하면서 그녀가 이직한 것을 알게 되었고 전 직장보다 좋은 자리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말 오랫동안 기다리던 날이었고 그녀의 새 출발을 축하해 주고 싶어서 작은 꽃다발을 사고 메시지 카드도 썼다. 예상대로 그녀는 드디어 정규직으로 일을 하게 되었고 처음에 지원한 부서보다 커리어 측면에서 더 좋은 보직을 맡게 되었다. 그녀가 워낙 일을 잘하기 때문에 새 직장에서도 금세 인정을 받은 것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일도 잘하고 성실한 사람이지만 안정적인 자리를 찾기까지 무려 5년 이상의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우리는 '로또 취업'이라고 불리는 공기업 정규직 전환에 대해서도 분개했다. 그녀도 지금의 자리를 찾기 전까지 오랜 시간을 불안감에 떨었고 나 역시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여전히 불안하다. 하지만 이것은 나의 선택이기 때문에 시세에 편승해서 나에게도 안정성을 보장해 달라고 조르고 싶지는 않다. 인간의 삶에서 직업이 중요하고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 고용안정성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안정성이 보장되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이런 방식으로 채용이 되는 것은 화가 나는 일이었다.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누군가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노력하며 불안감을 견뎌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미 정규직 전환이 된 다른 공기업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전에 근무했던 또 다른 인턴은 2년을 준비했다. 운이 아닌 실력으로 그 자리를 차지한 그녀가 너무 대견했고 자랑스러웠다. 조금 늦긴 했지만 그녀가 지금이라도 제 자리를 찾은 것 같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직장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우리는 공원을 산책하면서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다. 평소에 메신저에 나타나는 사진이나 상태 메시지를 유심히 보는 편이라서 작년에 그녀에게 정말 힘든 일이 있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예상대로 그녀는 아주 오랜 만난 연인과 헤어졌고 이직을 하기로 했던 직장에서 갑자기 채용을 취소하면서 굉장히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대충 예상은 했지만 사람마다 슬픔을 극복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아는 척을 하기도 오랜만에 얼굴을 보자고 하기도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그 시간을 함께 하지는 못했다. 내가 힘들 때 항상 위로가 되어주었던 그녀인데 나는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결국 그 힘든 시간을 잘 견디고 씩씩하게 잘 이겨내고 다시 웃는 얼굴로 만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취업 턱을 내겠다고 했지만 나중에 승진턱을 내라고 하면서 그녀의 앞날을 축복해주었다. 좀처럼 좋은 일이 생기지 않아서 기쁘다는 감정을 느낄 일이 없었는데 그녀에게 좋은 일이 생겨서 나도 좋았다. 지금까지 힘들었던 만큼 그녀에게 기쁜 일만 생겼으면 좋겠다. 나도 온 마음을 다해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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