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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페 Oct 15. 2019

러시아 초심자의 블라디보스톡 여행기

여행기 #3


여행의 시작


    비록 서방세계에서는 준 동양 취급을 받는 러시아지만, 지속적인 민족 강제이주정책에 더불어 흐루쇼프 선생님이 맞은 미국 뽕, 고르바초선생님과 옐친 선생님의 개방 덕에 우리나라보다 더 동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냄새 정도는 맡을 수 있는 도시가 있어 이참에 한 번 나도 유럽 땅을 밟아보자 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짧은 여행을 다녀오게 됐다.

    찾아보다 보니 블라디보스톡은 제 n의 타국가 도시 류의 별명이 많은 것 같았다. 제4의 로마, 제2의 샌프란시스코, 제2의 라스베이거스 등 다른 나라를 돌아보며 부러웠던 도시가 많았던 러시아 연방의 마음은 내가 잘 알겠으니, 이제는 제2의 메시로 불렸던 선수들이 다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연방 정부가 알아줬으면 좋겠다.


    처음 가보는 러시아의 첫인상은 기내식 샌드위치에서 어느 정도 정립이 됐다. 기내 옆자리의 불쾌한 커플이 서로의 발을 쓰다듬어주기 시작할 무렵에 제공이 된 치킨 샌드위치는 그다지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치킨 살과 야채 조금을 감싸고 있던 식빵은 집어 드는 순간 가루가 되어 바사삭 흩뿌려져 버렸고, 치킨 살은 기묘하게 매끈하고 물컹하여 살짝 고무 같은 식감을 주었다. 고르바초프 형님이 시장 개방과 동시에 다 처리해주셨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런 저품질의 제품이 아직도 널리 유통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생각보다 이 여행에서 보고 느끼는 게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 러시아!


    10월 초의 블라디보스톡 날씨는 11월 초의 서울 날씨와 비슷했다. 공기는 시원하고 건조했고, 하늘은 푸르고 구름 한 점 없었으며 바람은 잠잠해 여행하기 아주 딱 좋은 날씨였다.

빠크롭스키 성당 근처의 에어비앤비 숙소. 여러모로 완벽했다.



블라디보스톡의 교통


    나는 블라디보스톡의 교통에 굉장히 큰 감명을 받았다. 처음에는 렌트를 하려 했으나, 여러 여행 후기에서 차를 빌리는 것은 추천하지 않는다는 글을 많이 봐 포기하기로 했었다. 이제 와서 하는 생각인데, 차를 빌렸으면 아마 박살 나지 않았을까? 도시를 계획할 당시 샌프란시스코를 벤치마킹했다고 하는데, 그에 걸맞게 중심부의 대부분 도로는 일방통행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차선은 벤치마킹하지 못했는지 차선이 없는 길도 많고, 있어도 러시아인 눈에는 잘 안 보이는 것도 많은 듯했다. 차선이 없는 일방통행 길은 아주 매력적이다. 어차피 서로 양보도 안 하는 마당에 다 같은 방향으로 수백 대의 차량이 차선 없이 달리다 보니 이게 공공도로인지 F1 경주인지 알 게 뭐냐. 굳이 큰돈 들여 F1 경기장 갈 필요 없이 블라디보스톡을 가면 범퍼 없고 흙먼지 가득한 차량들이 무섭게 경주를 하는 것을 저렴하게 관람할 수 있다.


    러시아에서는 자동차에 신경 쓰는 것 자체를 운전자의 수치라고 여기는 것 같다. 불곰이 옆에서 들이받기라도 했는지 옆문이 열릴 것 같아 보이지도 않게 찌그러진 차들도 있는가 하면 언덕에서 몇 바퀴 구른 것처럼 온 차체가 고루고루 우그러져 있는 차들도 있었다. 다섯 대 중 한 대는 범퍼가 부서져 있으며 범퍼가 아예 없는 차도 종종 보이고, 헤드라이트가 없는 차도 있었으며 헤드라이트는 깨진 채 안에 딱 전구 하나만 꽂혀있는 차들도 있었다. 세차를 하는 것도 수치, 고장 난 차를 센터에 보내는 것도 수치, 부서진 부분을 수리하는 것도 수치, 브레이크를 조금만 밟는 것도 수치, 속도를 천천히 올리는 것조차도 수치로 생각하나 보다.

자동차 관리는 운전자의 수치


    자동차 좌우 핸들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 러시아 전체가 우측통행을 하고 있지만, 블라디보스톡에서는 차 수입은 그냥 있는 그대로 수입해서 쓰는 것 같다. 일본차는 우핸들이고, 한국이나 독일 등의 외제차는 좌핸들이다. 그러니까, 우측통행의 도로지만 핸들의 위치는 자기 멋대로라는 것이다. 오히려 일제 차가 훨씬 많아 우핸들이 도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우핸들이면서 우측통행을 하고 있는 것은 내내 묘한 위화감을 주었으나, 우측통행에서는 좌핸들이어야 한다는 나의 생각이 쓸데없는 고정관념이었음을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됐다.

    

    우리는 러시아식 Uber인 maxim 어플을 여러 번 이용했는데, 마지막에 공항으로 가는 길에 탔던 프리우스의 운전자 Igor는 러시아식 운전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보여주었다. 처음 차를 탔을 때부터 이상한 낌새를 느끼기는 했다. 그는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흥얼거리면서 운전 내내 핸드폰으로 어떤 여성과 문자를 끊임없이 했고, '굿바이 블라디보스톡! 하하하!' 하고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가 하면 갑자기 도로 중간 무렵에 차를 세우고 우리에게 '차가 좀 막히는데 계속 갈까?'를 구글 번역기를 이용해서 물어보는 등 척 보기에도 비범한 행동들을 지속적으로 했다.

    심한 체증으로 차가 도로에 멈춰있을 무렵, 사이렌을 울리는 경찰차 한 대가 1차로 안쪽으로 달려왔고 다른 차들이 다 비켜서 주고 있었다. 러시아인들도 공권력은 무서운가 보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고르는 갑자기 경찰차 뒤에 딱 붙더니 경찰차로 인해 생긴 길을 얌체같이 따라가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차가 이고르 같은 짓을 하려고 시도했다. 경찰차 뒤로 끼어드려고 하는 차가 수십 대 있었지만 이고르는 한 번을 결국 한 번도 그 자리를 내주지 않았고, 우리는 왜 옆면이 우그러진 차들이 이렇게 많은지 알게 되었다. 이고르는 그 경쟁자들을 제칠 때마다 중얼중얼하더니 하하하 웃기를 반복했고, 경찰차가 우리 행선지랑 다른 곳으로 빠질 때에야 아쉬워하며 '스파씨바! 폴리스!' 하고 크게 소리를 지르고는 핸들을 치며 웃었다. 미친놈...

경찰차를 따라가는 얌체 운전자 Igor

    


블라디보스톡의 관광


러시아인


    러시아인들은 대체로 엄청 험한 표정을 짓고 다닌다. 도착 첫날에는 날씨가 궂어 전체적인 분위기가 을씨년스러워 그런 줄 알았는데, 다음날 매우 화창하게 하늘이 개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표정은 극도로 화가 난 상태 그대로였다. 러시아 사람들은 처음 보는 사람이 웃으면 멍청하게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렇다고 화가 난 표정으로 돌아다닐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가끔은 도로변에 가만히 서서 무서운 표정을 짓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는 남자들도 있었다.

    카더라 통신에는 러시아의 결혼은 철저하게 서로의 손익을 따진다고 한다. 여자는 남자가 경제력을 잃으면 가차 없이 이혼하고, 남자는 더 젊고 매력적인 여자를 만나면 가차 없이 환승한다고 하니 이 얼마나 매정한 방식인지. 부족하면 도태되는 것이 딱 자연 그대로의 약육강식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길거리나 음식점, 공원 등에는 아이와 엄마 단 둘만 있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고, 이상하게 공공장소에서 같이 있는 여자의 엉덩이를 움켜쥐는 남자도 많이 보았다. 국민 정서의 차이로 생각하기로 했다.


관광


    블라디보스톡은 매우 작은 도시이다. 관광객들이 가는 장소는 전부 정해져 있으며, 네이버 블로그에 다량 소개되어 한국인으로 가득한 장소들 이외에는 일본, 중국, 한국 여행객들이 고루 분포되어 있다. 일본인 관광객은 일본을 제외하면 거의 마주친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아마도 블라디보스톡은 일본인들에게도 나름 의미가 있는 관광지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여행 중에 주변에 한국인이 많다는 것은 외국 느낌을 덜 들게 하므로 여행 시 기피하게 되는 조건이다.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관광명소가 한국인으로 가득했고, 해당 장소가 러시아 관광지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없으므로 사실상 루스키 섬은 제주도, 해양공원은 속초, 아르바트 거리는 명동쯤 되는 느낌을 준다.

제주도나 속초쯤 되어 보이지만, 사실 유럽이다.

    관광은 루스키 섬, 독수리 전망대, 아르바트 거리와 그 근처의 해양공원, 혁명광장, 빠크롭스키 성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많이 나열했지만 하루면 다 돌아볼 수 있다. 날씨도 좋고 풍경도 좋았지만 특출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일정을 마치고 여유를 즐기던 늦은 오후, 아르바트 거리의 한 기념품 가게에서 푸틴의 얼굴이 그려진 여권케이스를 사버리고 말았다. 강렬하게 쳐다보는 것이 멋들어져 보이는 데다 '블라지미르 블라지미로비치 뿌찐'이라는 이름이 이국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홧김에 사서 여권을 끼워놨다. 출국 심사관은 보고도 무시했지만 비행기 티켓팅 승무원은 여권을 보고 주변에 전파하며 나에게 엄지를 추켜올려주어 기분이 조금은 좋아졌다. 타국 원수의 얼굴을 여권 커버로 사용하는 것이 여권법에 저촉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블라지미르 뿌찐


음식


    블라디보스톡의 음식은 나에게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했다. 가격도 저렴하긴 하지만 다른 훨씬 저렴한 나라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잦은 주 구성원의 변경과 강제 이주 등으로 지역 특색에 맞는 음식이 발전할 겨를이 부족했는지 딱히 블라디보스톡 혹은 프리모리예 지방만의 독특한 음식이랄 것이 별로 없어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일반적으로 여행에서의 행동에 대해 독특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좋아하는 내가 의미부여를 할 부분이 많이 없어서 그런 것이었을 수도 있다. 가령, 별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모 수제버거집에 들르는 것보다는 '동유럽의 극동지방에서 맛보는 북유럽식 롯데리아의 버거'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헤스 버거(핀란드의 패스트푸드 체인 매장)를 방문하는 것을 나는 더 선호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도착하자마자 북한 식당을 방문했다. 의미를 부여하기도 딱 좋고, 실제로 북한 사람과 북한 음식이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는 아주 실망스러웠다. 북한 종업원들은 딱히 새터민들과 다를 게 없는 행동/말투를 가지고 있어 새롭지가 않았고, 북한 음식들은 서방세계에서 경쟁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조미료들이 얼마나 맛있는 것인지 알게 해 줄 뿐이었다. 그냥 내 400 루블이 북한의 비밀 민주화 단체의 운영 자금으로 흘러들어 갔을 것이라 자위하고 말았다.

북한식 랭면과 강냉이 온면


    킹크랩과 독도 새우는 대하 및 영덕대게가 더 나았다. 가격은 물론 비할 바가 아니게 저렴하긴 하지만, 굳이 블라디보스톡까지 가서 먹을 만한 메리트는 없다, 이게 내 결론이다. 트립 어드바이저의 추천이었으므로 딱히 운 없이 맛이 좋지 않은 곳으로 갔던 것은 아니었을 확률이 높다.

킹크랩과 독도새우, 대게와 대하를 먹도록 하자.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갔던 카페에서 '구소련의 아침'이라는 독특한 메뉴를 발견해 얼른 시켜보았다. 여전히 KGB 요원에게 감시받는 듯한 느낌이 드는 출근길의 맛이라고 생각하고 시켰지만, 달달한 캐러멜 마끼아또의 맛이 나는 데다 위에는 마시멜로와 생크림이 올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구소련의 아침'은 기나긴 냉전의 종말과 자유진영으로의 편입이 주는 달달함을 의미했나 보다. 91년 12월 27일 아침의 맛인 게지.

구소련의 아침



기타

- 공항에서 기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톡 역을 향해 가는데 옆에 보이는 풍경에 선로를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차를 타고 고속화도로를 가는데 어쩐지 그 옆에서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도 봤다. 왜 거기를 걷지?

- 도로나 건물에서 확성기를 통해 러시아어 알림이 들려오면 어쩐지 콜 오브 듀티 게임의 황폐화된 독소전쟁의 붉은 광장이 떠올랐다.

- 전문성 하나 없이 투어를 진행하는 사람들도 많아 불쾌했다. 러일전쟁이 왜 언제 일어났는지도 잘 모르면서 왜 러일전쟁 방공호를 지나는 투어 가이드를 하고 있지?

- 토카렙스키 곶은 당시 체감온도가 6도였지만 그 바다에서 윈드서핑, 카이트서핑, 심지어는 수영을 하는 백인들도 있었다. 나는 약하다.



맺으며....


    사실상 러시아 꼬리의 맛만 보고 온 느낌이다. 명왕성 표면적에 달하는 면적을 가지고 있는 나라에서 작은 도시 하나 안에서 하루면 다 걸어 다녀 볼 수 있는 부분만을 보고 왔으니 당연히 그럴 테지... 왜인지 조만간 우크라이나 등의 구소련 국가들 및 러시아 메인 도시들을 둘러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진짜 조금 있었지만 러시아인과 함께 있으면 무언가 반드시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확신에 찬 기대감도 든다. 근시일 내에 러시아 및 동유럽을 여행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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