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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페 Sep 09. 2019

동남아 초심자의 베트남 여행기

여행기 #2

여행의 시작

    

    지정학적으로 중동 못지않게 고약한 곳에 위치한 덕에 아무리 지도를 펼쳐놓고 각을 재봐도 3박 4일 정도의 가벼운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곳이 그렇게 많지가 않다. 지구 정복을 꿈꾸며 관광객에게 8만 원에 육박하는 입장료를 요구하는 시진핑의 중국, 루블화를 기축통화로 만들고 싶어 하는 푸틴의 러시아, 이웃들의 불화를 추구해 이득을 보려는 아베의 일본에 더불어 반지성 불법점거 테러단체 북조선에 이르기까지, 어째 가볍게 여행 가기 만만찮은 나라들로만 가득하다. 그나마 같은 자유주의 진영 하에서 동맹을 맺고 있던 일본과의 관계가 이지경이 났으니, 저 멀리 동남아로 눈을 돌려보는 수밖에.


    육군훈련소에서 정훈교육 시간에 잠들지 않고 충실히 교육을 이수했다면 현재의 베트남은 월맹이 간첩을 적극 활용해 월남을 능욕하고 미군을 몰아낸 후 사회주의 공화국을 설립해 생긴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행 초기에 한 때 적국이었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베트남 국민들을 대하는 것이 조금 껄끄러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으나, 베트남 국민들은 우리나라가 패전국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그런 생각은 접어두어도 좋다. 임무 미완 상태에서 종전을 위해 철수하는 것이 패전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변명 같아 보일 수 있으나, 어찌 되었든 지금에서는 1인당 GDP가 대한민국이 베트남의 열 배가 넘으니 아무렇게나 생각하라지.

다낭의 미케비치에 누워서...



베트남의 숙소


    베트남은 나라 전체가 공사판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공사장에서 공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삶에서 공사를 하고 있으므로, 두려운 사람이 잘 피하면서 다니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베트남 입국 후 하이퐁Hải Phòng에서의 첫 밤을 4성급 호텔에서 묵었는데, 건물 내부가 공사판이었다. 보수공사가 아니라 건물 중간에 철제 계단을 놓는 대형공사를 하고 있었다. 뭔가 항의를 하려다 그냥 말았다. 한국과 베트남의 환율이 1:20이었으니 여기는 0.2성 정도라고 생각하면 마음의 짐이 조금은 덜어질 수 있겠다.

아침에 공사 소리에 잠을 깨 밖으로 나가보니..


    다낭에서는 에어비앤비를 통해 어디 외진 곳에 집 한 채를 통째로 빌려서 숙박을 했다. 한국인이라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 우리는 거대한 바퀴벌레들을 한 아름 보았다. 녀석들은 동남아의 따뜻하고 풍족한 기후 속에서 맛있는 것들만 골라서 많이 먹고 자랐는지 그 크기가 상당했다. 더운 나라 특성인지 국민성의 표출인지 모르겠으나 대부분의 집들이 대문뿐 아니라 집 내부의 문들을 활짝 열어놓은 상태였기에 골목과 내 집과의 경계선이 불분명한데, 그 골목길에서 무지막지한 녀석들을 대거 발견했으니 아무래도 나는 단잠에 빠질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 숙소의 호스트였던 나이 지긋하신 할아버지는 연착으로 인해 늦어진 우리의 체크인을 받아주러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에 우리를 마중 나와주셨다. 월남전에 참전하셨었는지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며 대한민국의 발전을 부러워하시던(그러나 나는 바퀴벌레를 피하느라 정신이 없어 제대로 대화를 진행하지 못했다.) 그 할아버지는 안타깝게도 열쇠를 가지고 오지 않으셨다. 열정이 넘치셨던 할아버지는 키를 가져올 수 있는 가족분에게 전화를 해 보시더니 피곤한 우리가 어서 쉬어야 한다면서 갑자기 집 담을 넘기 시작했다. 여든은 족히 되어 보이는 나이에 한밤중에 전깃줄로 범벅이 된 집 대문을 넘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게 미군의 침공을 이겨낸 국가의 평범한 국민인가 싶어 경외감이 들었다.

집 담을 넘고 계시는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열정으로 우리는 일찍 숙소에 들어갈 수 있었고, 씻고 잠드려는 찰나 열쇠를 가진 가족분이 열쇠를 전달해 주러 오셨다. 바퀴벌레에 대한 걱정에 비해 숙소는 생각보다 퀄리티가 좋아 이내 단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나는 그 숙소에 에어비앤비 평점 만점을 드렸고, 이내 우리도 최고의 숙박객이었다는 찬사를 들을 수 있었다.



베트남의 음식


    우리는 오만한 여행자였으므로, 트립 어드바이저를 위시한 다른 음식 리뷰 글들을 보고 음식점으로 들어가기보다는 그냥 시끌벅적한 음식점 하나를 잡아 들어가서 '분짜! 분짜!'를 외친 것이 음식 주문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처음에는 이거 이거 하면서 손가락으로 이것저것 주문해 먹어보았으나, 이내 분짜와 넴이 최고라는 것을 알아채고야 말았다. 그 이후로는 음식점에 들어가 손가락 두 개를 펼친 후 분짜! 분짜! 넴! 넴! 만 하게 됐고 이내 우리 눈 앞에 맛 좋은 한 끼 식사가 눈앞에 차려졌다. 탄단지 균형이 완벽한 데다 맛도 가격도 불평하려야 불평할 수 없는 이놈의 분짜! 아, 또 먹고 싶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분짜.


    뽀-응공! 초록색 택시 기사 아저씨한테 배운 '맛있는 쌀국수'라는 베트남 말이다. 현지인들이 보기엔 정신 나간 여행자 둘이 와서 분짜! 분짜! 뽀 응공! 뽀 응공! 하고 다녔으니 제법 한심해 보였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 맛을 본 이라면 마법의 주문마냥 입속에서 맴도는 그 매력적인 '응공!'을 거부하기 힘들 테다.

    아, 하지만, 그 맛있는 음식을 조리한 조리도구는 되도록 쳐다보지 않는 편이 좋다. 다른 한류도 좋지만 먹거리 X파일 같은 플랫폼이 한번 대대적으로 베트남에 유행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체적으로 위생 개념이 우리나라랑 비교해 약간 좋지 않기 때문에 밥을 먹고 있는데 옆에서 선풍기를 켜놓고 빗자루질을 하는 의도를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경우도 마주할 수 있기에 꽤 단단한 마음가짐이 요구된다.

뽀 응공!


    베트남은 세계 2위의 커피 생산지라고 한다. 환상적인 가성비를 자랑하는 G7 커피도 이미 우리나라에 명성을 낭낭하게 떨치고 있으며, 최근 편의점에서는 베트남식 콩카페 코코넛 라테를 파는 것도 발견했다. 그러나 내가 맛본 비엣남 제일의 커피는 역시 Highlands coffee의 메인 메뉴 Phin sua da라고 볼 수 있겠다. 베트남 특유의 필터링 기법으로 뽑아낸 커피와 연유의 조화로운 달콤 쌉싸름함이 일품이었다. 진정한 베트남의 맛을 본 나는 귀국 후 나는 곧바로 하이랜드 커피에 한국으로의 사업 진출을 요청하는 메일을 보냈으나, 답장으로 SMTP: 451, 4.30.0의 에러코드만 주야장천 받았으므로 이내 포기했다. 여건만 된다면 내가 직접 한국 지점을 내고 싶지만, 일개 소시민으로 살기도 버겁기에 작은 공이나 쏘아 올리며 그저 기다리기로 했다. 

Highlands coffee의 phin sua da


    중간에 들어간 베트남식 하나로마트에서는 저렴하고 이국적인 과일들이 굉장히 많았기에 종류를 불문하고 전부 하나씩 사 와서 먹어보았다. 맛만 보자면 용과, 망고, 망고스틴을 제외하면 사과, 배, 귤, 수박, 오렌지, 청포도 등이 압승이므로 그냥 '아! 나도 한 번씩은 먹어봤다!' 정도의 의의만을 가지게 됐다. 베트남 자몽 buoi는 일반 자몽에 비해 맛이 굉장히 좋았으나, 이 몹쓸 과일을 까먹겠다고 칼을 들고 설치다가 왼손 네 번째 손가락 끝을 약간 심하게 베이는 사고가 일어났다. 먼 이국 땅까지 날아와 자몽 하나 먹어보겠다고 피를 잔뜩 보고 있는 내가 문득 서러웠지만, 이런 위생상태에서 혹여나 2차 감염의 우려가 있지는 않을까 헐레벌떡 호텔 로비로 달려가 블러드! 밴드! 허리 업! 을 외치며 직원을 찾았다. 다행히 4성급 호텔에 걸맞게 확실한 emergency 대응 체계가 있어 보였으며, 나는 소독제와 지혈제, 붕대를 획득하여 방으로 올라와 나머지 자몽을 해치울 수 있었다.

베트남식 과일가게

    

    그 외에 넴, 반미 버거, 짜조 등 굉장히 괜찮고 저렴한 음식들을 많이 맛볼 수 있어 식도락 여행지로도 상당히 괜찮다는 평을 내릴 수 있었다.



관광에 관하여


1. 베트남의 도로


    베트남에는 오토바이가 많다. 그리고 도로 규칙도 우리나라와 약간 다르다. 우선 경적을 울리는 것은 '너에게 불만이 있다'가 아니라 '내가 여기에 있다'라는 뜻이므로, 누가 자꾸 나한테 경적을 울리는 것 같아도 별거 아니니 신경 쓰지 말고 같이 경적을 계속 눌러주면 된다. 중앙선, 차선, 신호등은 다른 나라에서 해놓으니깐 해놓은 것일 뿐 별 다른 의미는 없어 보인다. 특히 지방 소도시에서 그 경향이 심한데, 1차로에서 우회전하고 3차로에서 좌회전하고 가끔 역주행도 하고, 빵빵 거리면서 하기만 하면 아무 문제없다. 나 여기 있는 거 너네가 알기만 하면 돼 라는 마인드로 아무렇게나 운전하면 된다. 충격적이게도 모두가 잠든 새벽 2시에 공항에서 에어비앤비 숙소로 가는 왕복 4차선 일반 도로에서 우리의 택시기사는 클락션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로 브레이크 없이 신호등을 무시하고 도로 끝까지 내달렸다. 우리네 도로에서 그 정도 소음을 내려면 배기량 6000cc 정도 되는 스포츠카가 필요한 반면 베트남에는 그냥 일반 차만 있으면 되니 가성비가 훌륭한 편이라고 볼 수 있다.



2. 베트남의 시민


    베트남 사람들은 영어를 잘 못한다. 이들 입장에서 영어는 패전국의 언어이므로 배울 당위가 전혀 없는데도 우리는 굳이 영어로 질문을 했는데, 이는 우리가 오만한 여행자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역시 베트남도 다른 3세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기축통화인 달러화를 자국 화폐 못지않게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영어를 하는 편이 본인들 관광수입에도 도움이 될 것이기에 다낭, 하노이 등에서 관광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영어를 구사했는데(이 사람들도 dollor를 달러로 발음하면 잘 못 알아듣고 '또-라'라고 발음해야 한다.), 이들을 제외한 일반 시민들은 영어를 아예 알아듣지 못했다. yes, no를 못 알아듣는 정도니 yes라고 말만 하지 말고 고개를 열심히 끄덕거리면서 yes를 해야 대화를 진행할 수 있었다. Thanks 도 못 알아들으니,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게 되면 까몬 까몬(cam on) 해주고 셀카나 같이 찍자고 하면 된다. 구글 트랜슬레이터를 열심히 활용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 조만간 언어의 장벽을 허물 날이 오겠지?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늘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여행 전에 어떤 블로그에서 '베트남의 초록색 택시는 호객행위를 하지 않는 택시'라는 글을 보고 첫 택시로 초록색 택시를 선택했다가 보기 좋게 15배의 바가지를 쓴 경험 때문에 호객행위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캇바Cát Bà 섬으로 들어가려는 도중 자꾸 승선티켓을 우리에게 강매하려는 아주머니를 만났고,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녀가 호객 대장님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비키라고 가볍게 밀쳐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덕분에 베트남식 주먹감자도 먹고 삿대질도 받고 한 마디도 그 뜻을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대번에 욕임을 알 수 있는 베트남 말도 들을 수 있었다. 욕을 먼저 배우는 것이 타 국가의 언어에 가장 친숙하고 빠르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임을 상기한다면 호객 대장님을 건드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닐지도 모른다. 대신, 그 이후에는 그 지역 일대에서는 어떤 베트남 사람도 우리에게 접근하지 않게 되므로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것을 견딜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냥 공손히 거절하는 것이 좋겠다.



3. 베트남의 풍경


    깟바 섬에서 나오는 마지막 배 티켓을 가지고 배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 도무지 알 수 없는 모자란 놈들이 배 정원은 생각도 않고 티켓만 주야장천 팔았는지 배에 타려는 도중에 갑자기 자리가 없다고 쫓겨나 버렸다. 주변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이 되어버렸다. 타려는 사람들과 못 타게 밀어내는 사람들, 배 안으로 안 들어가고 갑판 위를 정복해 버린 사람들과 확성기를 통해 뜻 모를 베트남 말로 고함을 지르는 사람들까지... 갑자기 분위기가 피란 상태가 되었고 전혀 상황판단을 할 수 없던 우리는 급변하는 혼란한 분위기 속에서 상황을 파악해보려 애쓰기 시작했다. 

갑자기 분위기 피란


    주변에 한국인은커녕 영어로 뭐 물어볼 수 있는 외국인도 없었던 우리는 마지막 배를 영문도 모른 채 보내야만 했고, 사태가 잠잠해진 후에야 옆에 있던 청년에게 무슨 일인지 구글을 통해 물어볼 수 있었다. 그가 말하길, 확성기를 통해 말하던 사람이 배 한 척을 더 보내준다고 기다리라고 했다고 했다는 것이다. 다음 비행기를 놓칠 판국이었으므로 배는 언제 오는지, 제시간에 떠날 수 있는 것인지 전전긍긍하며 자꾸 물어보던 우리에게 그 친구가 보여준 핸드폰에는 번역된 문구가 적혀있었다.

저 멀리 백악관에서 배를 기다립니다. 마음의 평화. 베트남 아름답지요?

Hạ Long

    결국 마지막 배보다 약 1시간 늦게 배가 도착했고, 해질 무렵의 기가 막히는 하롱베이의 광경을 보면서 적당히 지각하고 적당히 배고픈 상태로 다음 비행기를 타러 공항으로 갈 수 있었다.


    베트남을 여행하며 궁금했던 하나의 주제, 베트남 사람들은 이렇게 살면서 서로에게 짜증이 나지 않는 것일까? 이런 위생상태를 고발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건가, 교통 법규나 질서 등을 개선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가? 에 대한 대답을 깟바 섬에서 만난 이 친구(28세, 경찰)에게 들은 말로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이 친구들은 마음의 평화를 가지고 있었던 거지. 나한테는 없는, 우리한테는 있을 수 없는 그런 거.

베트남 아름답지요? 네, 아름답습니다.




Summary


    공산권 국가는 일반적으로 선호하지 않지만, 베트남 같은 경우 싼 물가와 굉장히 맛이 좋았던 음식들, 썩 괜찮았던 시민들, 호찌민 할아버지의 사진을 제외하면 비교적 선전 문구가 없었단 점에서 상당히 만족스러운 여행지라고 볼 수 있겠다. 다만, 땀이 많은 내 체질 상 더운 계절에 더운 나라로 가는 것은 당분간 삼가도록 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호찌민을 위시한 월남의 본거지로 여행을 떠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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