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철학
지금의 그를 만나기 전에 나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 늘 '합리적인'의심을 하는 편,이었다. 사회에서는 보통의 단어로 '아직 미혼'이라고 정했고, 스스로는 '비혼 주의'라 칭했다. 태어날 때부터 '응애 나 NO결혼' 은 당연히 아니었고 꽤 최근에, 그러니까 30대 중후반에 들어서야 확고해졌다. 물론 사랑에 대해서는 늘 인생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생각할 만큼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저 '결혼'이라는 제도나 의식에 대한 것을 의심하는 편이었다. 언제든 같이 살고 싶은 사람이 생길 거라고 믿고도 있었고, 그건 연령과 무관하다고 봤다.
이런 가치관이 정립되기까지 많은 과정을 거쳤지만 복기해보면 아무래도 그때가 시작이었던 것 같다.
회사에 입사 후 처음으로 사회에서 내 인생의 첫 연말정산을 하던 때였다. 드디어 아빠처럼 어른이 된 것 같아 복잡한 서류 준비하는 과정도 재밌던 시기였다.
'가족관계 증명서'
'가족' 이란 일단, 혈연에 의해 필연적으로 맺어진 내가 선택할 수 없으며, 서류가 없어도 DNA로 증명할 수 있는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어쨌든 사회에서 '행정업무' 처리를 위해 이런 서류가 필요하다는 것에 조금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이미 결혼한 친언니는 내 기준 이제 서류상 가족이 아니었으며 우리의 새 가족으로 들어온 형부도 물론 가족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돈네는 물론, 양가에서 가족으로의 합류를 인정하고 축하하는 의식을 얼마나 많이 해왔던가. 심지어 나와 형부의 동생까지 함께 해야만 하는 자리도 있었고 더 중요한 것은 내 가족관계 증명서는 변할리 없지만 언니가 이혼하지 않는 한 우리는 계속 가족이라고 굳게 믿고 살 거라는 것이었다. 아직 사회를 다 모르는 어린 나로서는 혼란스러웠던 모양이다. 이 충격을 시작으로 '결혼'에 대한 제도적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처음부터 하나씩 생각해 보았다.
짧은 연애 후 결혼하게 된 언니가 결혼하던 과정.
어느 날 갑자기 이 남자랑 결혼할 거라며 폭탄선언을 했다. 부자연스러운 서프라이즈였다(부자연스럽다 와 서프라이즈는 당연히 잘 어울리는 단어 같기도 하지만. 음) 양가의 개혼이었고 서로 사랑하고 원하고 다행히(!) 거슬리는 점이 없어 연애기간 1년이 안돼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 물론 천사 같은 조카를 낳고 아주 잘 살고 있다.
부모님의 입장에서 생각해봤다. 어느 날 갑자기 내 딸이 사랑하는 남자라며 데려왔고, 사위로 받아들였다. 엄마는 내 딸을 다 이해하고 사랑하지만 딸의 남자, 사위까지도 다 이해하고 사랑하고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걸까? 애초에 부모와 자식이 독립된 인격 체기 때문에 극히 드문 경우는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개인의 이상형과 사랑이기에 다를 수밖에 없고 100%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어쩌면 흔하디 흔한 고부간의 갈등, 장모 사위 간의 갈등? 너무너무 이해되고 당연한 현상이지 않나.
내 남편도 남인데 본인이야 사랑의 콩깍지가 씌어 이 사람과 하나가 된 것 같겠지만, 내 가족들 입장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모르는 사람을 데려와 이제 딸 혹은 아들처럼 가족이 돼라 하고, 형부 형수라 칭하며 일가족 관계가 돼라 하는 게 어떻게 '당연히' 받아들여지는 일인가. 심지어 사회에서도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을.
어쩌면..
나는 개인적인 환경과 특유의 비판적인 시간으로 부정적인 측면만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보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을 하려면 '공감'이 꼭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냥 결혼했으니 '당연히' 챙겨야지, 이제 가족이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하는 것들을 보며 스스로가 도무지 설득이 되지 않았다. 부모님에게도 그랬듯이 '나'자신의 독립성과 피해를 끼치지 않는 자유는 보장받아야 했다.
그러나 친언니와 측근들의 결혼 준비를 보며 일어나는 사소한 감정 문제들, 싫지만 해야만 하는 일들과 좋아하는 척해야 하는 순간들이 도무지.. 납득이 안되다 보니 점점 '비혼'이라는 결론이 도출되고 있었다.
너무 감정적이고 비용적으로 비효율적이고 불필요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사회를 유지해 가려면 당연히 유지되야하는 제도라는 것을 안다. 후후 물론 반 사회적인 인간은 아니며, 첫회사에서 12년째 사회생활을 무사히 해 나가고 있는 평범한 사람이다. 단서를 달았지만, 지극히 나 개인이 처한 환경에서 살아오며 겪었던 경험에 의해 형성된 신념일 뿐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짚어본다. 이 모든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함께 살고 싶은' 남자와의 연애가 아직 없었던 것일 수도 있고 말이다. 이때까지는 뜨거운 사랑을 하는 순간에도 곧 사라질 호르몬보다 이 불편함이 비효율적이라는 이성이 좀 더 센 편이었다고도 생각한다.
그렇게 가치관이 정립되고 곧 신념이 돼가던 어느 날
스스로 그 신념을 깨는 어떤 일이 생기고 말았다.
해외로 10일이 넘는 꽤 긴 일정의 출장을 가게 되었다. 나름 얼리어답터로 아무것도 없이 아이폰 하나만 있으면 나는 세계 어디에서든 살 수 있도록 세팅되어있었다. 순조로운 일정이었다. 마지막 날 저녁, 우버택시에서 그 소중한 것을 놓고 내리는 일이 발생했고 다시 사무실로 복귀해 많은 것을 해봤지만 결국은 되찾지 못하고 귀국하게 되었다.
아니, 얼리어답터라는 단어를 내가 감히 써도 되는 것인가? 싶을 정도의 그냥 멍청이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모든 포털 사이트, 모바일 메신저 등등의 비밀번호를 보안상 모두 다르게 쓰던 나는, 내 분신 같던 아이폰의 메모장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두고 필요할 때마다 찾아 사용했다. 복잡한 기호를 사용했지만 나름 규칙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당황해서 아무거나 일단 막 넣어봤던 것 같다. 아무 데도 접속을 못했다. 비밀번호를 초기화하려 해도 나와 컨택할 수 있는 다른 메일이나 수단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나임을 증명할 수가 없는 현실. 허허 웃음만 나오는 상황.. 시간도 모르겠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겠고 엄마 핸드폰 빼고는 외우고 있는 연락처도 없었다. 우리 가족도 내가 지금 어디서 뭐하는지 알 수가 없다. 정말 우주에 떨어지면 이런 느낌인가 싶었는데 정말 세상에서 내가 없어진 기분이랄까. 월요일을 기다릴 틈도 없이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가게에 들어가서 바로 개통을 했다.
애플에 로그인을 해야만 폰을 사용할 수 있는데 아직 나를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이 없고 연락받을 곳이 없어서 남은 주말은 이렇게 적막하게 보내야만 하지만 약간은 안도가 되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꽤 진지했다.
'동거인이 필요해. 아니, 보호자.. 적어도 나를 증명해줄 늘 내 옆에 있는 반려자가 있어야겠어'
사회에서 요구해서가 아니라, 나이가 차서가 아니라 약간의 공황(!) 상태와 해프닝을 겪고 나서 내가 스스로 필요해지는 순간이 와버린 것이다. 남들보다 평범하지 않게 갖게 된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이유라도 필요했다.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이 정도의 이유도 없어 보였던 때라..
그렇게 내 신념을 뒤엎는 해프닝을 겪은 지 딱 한 달 뒤에 지금의 그를 만났다. 물론 지금 되짚어보니 앞뒤가 딱딱 맞는 듯 보이지만 사랑은 늘 이성적이지 못한 법.
그저 운명의 이끌림으로 엄청난 사랑의 감정을 느꼈고 기꺼이 이 사람과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후에 들었지만 그는 나와 연락한 지 삼일 만에 이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다) 어떤 계기로 인해서라는 논리적인 끝맺음은 없다. 그냥 그건 그거고, 사랑은 사랑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언젠가 분명히 나 스스로 필요한 때가 온다는 것
그리고 그때 반드시, 운명 같은 사랑이 나타난다는 것.
38세 꽤나 늦은 나이라 이제 주변에서 연애하니, 결혼 언제 할래, 라는 질문도 못하고 안 하는 나이. 왜냐하면 진짜 실례라고 생각해서 그렇다. 지금 누구보다 많은 축복을 받고 있다. 각자의 사정에 따라 해야만 하는 시기가 있기도 하겠지만.. 큰 이슈없이 결혼에 대한 고민을 하는 시기가 분명히 있다. 그 기간은 꽤 길고(아마도 20대 후반부터) 고민의 압박으로 급하게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한다. 지금 생각하니 나조차 너무 어린 나이부터 결혼이 필요한가에 대해 고민을 해왔던 것 같다. 무려 10년을 고민해 왔는데 그렇게 10년에 걸쳐 끝없이 생각해 어렵게 도출했던 결론을 결국 뒤집어 버렸다. 물론 나는 여전히 제도적으로는 의심을 하고 있고 싫어하는 것은 하지 않는 쪽으로 유도하고 있고 부모님들을 설득하고 있지만 이제 '비혼 주의자'는 아니다.
명색이 비혼 주의자였던 자로써 처음에는 동거도 생각했다. 하지만 아프리카 주재원에 있는 그와 일상적인 '동거'가 안되기도 했고 하하하하. 3개월에 한 번씩 휴가를 나올 수 있는 여건이 코로나로 인해 매번 바뀌는 늘 불안한 장거리 연애 환경이다. 아마도 운명적 마음 다음으로 결정적이었던 계기가 불안한 장거리 연애 환경이다. 뭐 이렇게 보니 코로나도 한몫한 것 같다. 뭐 이 또한 계기 아닌가.
그렇게 나는 지금 결혼을 준비하고 있다.
아니 사실 우리는 결혼이라는 의식보다 가족이 되기 위한 준비에 한창이라는 표현이 더 맞겠다. 예를 들어 모든 것을 하나로 합치고 동거인으로의 룰을 정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월급을 누가 어떤 식으로 관리할까, 50대에는 둘 다 퇴사하고 지금 생각 중인 사업을 어떻게 시작할 건지에 대해 꽤 구체적으로 메이드 해나 가고 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가족이 되려면 결혼을 해야만 했다. 결혼식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혼인신고를 통해 공식적인 부부가 돼야만 했다.
앞서 밝혔듯 제도에 대해 완전히 복종(?)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구시대적인 개념에 대해서는 과감히 다 들어냈다. 요즘은 이렇게 많이들 하고 있어서 왜인지 모르게 내가 다 뿌듯하지만.. 결혼식에 불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부모님 행사가 아닌 우리 둘의 파티에 가족을 초대한다 정도로 생각하자 했다. 부모님들도 기꺼이 이것을 공감하시도록 자알 설득하면서 말이다. 아주 자발적으로 행복하고 소소하게 준비 중이다.
어쩌면..
그와 이때 만나 순조롭게 결합을 준비하기 위해, 여태껏 결혼에 대한 의심을 하고 있었고.. 그를 만나기 꼭 한 달 전에 그 신념에 크랙이 가게 된 건 아닐지 생각해본다.
인생의 모든 것은 운명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