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힘들 때 봐야 할 영화 처방

<어둠 속의 댄서> 라스 폰 트리에 (2000)

by 약방씨네마


<어둠 속의 댄서>는 사형대를 향해,
비극을 향해 경쾌한 탭댄스를 추며 나아가는 영화다.




"살아볼 결심"이 도무지 나지 않았던 적이 있나요.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요.


살고 싶지도 죽고 싶지도 않았던 스물둘의 여름이 떠오릅니다. 떠밀리듯 수험 생활을 마치고 떠밀리듯 대학에 입학한 저는 멍하니 표류하고 있었지요.


땀이 흐르는 몸뚱이를 바닥에 누이고 빛이 환히 비치는 창문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세상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다가와 창을 두드렸지만, 창을 열고 세상을 반기기에는 너무 무기력했지요. 한참을 그렇게 누워 있다 먼지처럼 바닥 틈새로 사라져 버렸으면 했습니다.




여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죽음으로 다가가는 한 여인이 있습니다.


2000년, 감독 라스 폰 트리에에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안겨준 문제작이자 "죽기 전에 반드시 봐야 할 영화"로 불리는 <어둠 속의 댄서>의 주인공 셀마 (비요크 주연) 는 자신의 손으로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치명적인 눈병을 아들에게 물려준 그녀는 아들의 눈 수술비를 모으던 중 살인 사건에 휘말리게 되지요. 배심원단은 공산주의 국가에서 온 가난한 맹인 여자를 신뢰하지 않았고, 그녀에게 교수형을 내립니다. 판결을 뒤집을 수 있는 유능한 변호사가 변호를 제안했음에도 그녀는 교수대로 향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구할 돈으로 아들에게 빛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누군가는 이 죽음이 '장애를 뛰어넘은 위대한 모성애적 희생' 이라고 말합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모성애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 죽음을 자식에게 귀속된 이타적인 희생이라 읽는 것은 그녀에 대한 기만이 아닐지요. 그녀의 아들은 그녀의 삶이었고, 그녀는 아들에게 빛을 선물함으로써 자신의 어둠에서 벗어나려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녀는 죽음을 선택하는 동시에 삶을 선택했습니다. 어둠과 동시에 빛을 선택한 셈입니다.



"선택"은 의미심장한 단어입니다. 그 해 스물둘의 여름을 살아낸 스물여섯의 저는 생각합니다. 무엇을 선택했느냐보다는, 선택을 했느냐의 여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삶을 주체적으로 바라보지 않은 사람은 죽음을 주체적으로 바라볼 수 없겠지요.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보다 더 자기기만적인 사람은 삶도 죽음도 선택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죽는 순간까지 희미한 눈으로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았던 셀마처럼, 선택을 부정하지 않는 삶을 살고자 합니다. 살아 있든 죽어 있든, 세상이 밝든 어둡든, 선택하지 않는 이는 모두 어둠 속에 있으니까요. 교수대에 선 셀마의 마지막 노래가 살고 싶지도 죽고 싶지도 않은 당신은 일으키길 바라며, 영화처방전을 마칩니다.


'그들은 이 노래가 마지막이라 하지 / 하지만 그들은 우릴 모른단다
노래를 떠나보내지 않는 한 / 마지막은 절대 오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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