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by Peppone

기록은 선택처럼 보이지만, 많은 경우 선택이 아니다.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단순하다.

기록되지 않은 일은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처리되기 때문이다.


행정과 제도는 문서로 움직인다.

통화는 남지 않으면 없었던 말이 되고,

현장은 사진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았던 장소가 된다.

과정이 기록되지 않으면 결과만 남고,

그 결과는 언제나 개인의 책임으로 정리된다.


이때 문제는 잘잘못이 아니다.

누가 틀렸는지, 누가 옳았는지를 가리기 이전에

아예 판단의 재료가 사라진다는 점이다.

판단할 수 없는 상태는 중립이 아니라 방치다.

그리고 방치는 반복된다.


기록은 분쟁을 키우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분쟁을 개인의 감정으로 축소시키지 않기 위해 필요하다.

“그렇게 느낀 것 아니냐”라는 말은

기록이 없을 때 가장 쉽게 등장한다.

느낌이 아니라 경과를 남길 때에만,

일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구조의 문제로 드러난다.


그래서 기록은 사후 대응이 아니라 예방에 가깝다.

같은 방식이 다시 작동하지 않게 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기록은 기억을 대신하고,

기억은 책임의 방향을 흐리지 않게 붙잡아 둔다.


이 매거진이 기록을 선택하는 이유는 여기 있다.

말해지지 않았던 과정, 누락된 시간, 정리되지 않은 책임들.

그것들은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다.

사라지기 쉬워서가 아니라,

사라지면 안 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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