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에서, 캐럴을 다시 떠올리며
금동의 밤은 조용하다.
도시 한복판인데도, 밤이 되면 소리가 얇아진다.
이 동네에서 나는 가끔 세상이 조금 느려진 것처럼 느낀다.
작년에 봤던 애니메이션 《Carol & the End of the World》가 문득 떠올랐다.
지구 멸망이 예정된 세계.
사람들은 여행을 떠나고, 고백을 하고, 의미를 찾느라 분주하다.
그런데 캐럴은 출근을 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상할 만큼 무기력하다.
낮고, 건조하고, 거의 감정이 없다.
처음엔 우울하게 들리는데,
곱씹으면 그게 가장 정확한 톤이라는 걸 알게 된다.
세상이 끝난다고 해서
갑자기 인생이 선명해지지는 않는다.
갑자기 용기가 생기지도 않는다.
갑자기 의미가 솟아오르지도 않는다.
그녀는 멸망을 드라마로 소비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 리듬을 지킨다.
그 태도가 묘하게 통쾌했다.
멸망보다 더 우스운 건
끝까지 의미를 만들어내려는 인간의 강박이라는 듯이.
애니메이션이라서 가능했던 거리감.
실사가 아니어서 우리는 한 발 물러나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비웃을 수 있었고, 그래서 웃을 수 있었다.
요즘 다시 어떤 통제 사회 서사를 보고 있다.
거기에는 웃을 수 있는 지점이 없다.
이미 우리가 겪은 현실과 너무 닮아 있어서다.
팬데믹 이후의 세계.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공간이 열렸던 시간.
공공의 행복이라는 말이 어딘가 낯설게 들리기 시작했던 기억.
비웃을 수 없으면 풍자는 죽는다.
남는 건 피로다.
그래서 다시 캐럴이 떠올랐다.
멸망 앞에서 출근하는 사람.
세상이 요동쳐도 자기 호흡을 지키는 사람.
금동에서 사는 나는
아직 멸망을 통보받지 않았다.
그럼에도 매일 작은 통제와 작은 피로를 통과한다.
어쩌면 가장 급진적인 태도는
거창한 혁명이 아니라
자기 리듬을 잃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나는
출근 대신 이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