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해 ― 빛이 닿지 않는 곳

by Peppone



침묵이 말의 붕괴라면, 심해는 그 이후에 도착하는 장소다.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 뒤에도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사람들은 여전히 밥을 먹고, 약속을 잡고, 계절은 바뀌고, 해는 뜨고 진다. 겉으로 보면 모든 것이 계속된다. 그러나 어떤 파열 이후의 인간은 더 이상 같은 수면 위에 있지 않다. 보이지 않을 뿐, 이미 너무 깊이 가라앉아 있다.


심해는 어두운 곳이지만, 단순히 빛이 없는 곳은 아니다.

빛이 닿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의 보통 기준 또한 닿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거기서는 위로와 조언도 제 기능을 잃는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도, 다 지나간다는 말도, 좋은 사람을 다시 만나면 된다는 말도, 결국 네가 잘 살아야 한다는 말도 하나같이 너무 밝고 너무 얕다. 심해에 있는 사람에게 수면의 언어는 종종 소음처럼 들린다. 그 말들이 틀려서가 아니라, 아직 도달할 수 없는 높이의 말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동안 바로 그곳에 있었다.

살아 있었지만 수면의 리듬으로 살고 있지는 않았다. 남들은 하루를 하루의 길이로 통과하는데, 나는 하루를 견디기 위해 며칠치의 숨을 미리 끌어다 쓰는 사람 같았다. 아무 일도 없는 얼굴로 앉아 있다가도 갑자기 가라앉았고, 분명히 깨어 있는데도 내 몸의 일부가 아직 어두운 바닥에 처박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은 내가 조용하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은 조용한 것이 아니라 너무 깊이 잠겨 있었던 것이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은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

무너지는 장면은 대개 드라마처럼 상상되지만, 실제의 붕괴는 훨씬 무색무취하다. 연락이 조금 뜸해지고, 말수가 줄고, 대답이 늦어지고, 웃음이 옅어지고, 사소한 일에도 피곤해진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그 정도다. 그러나 내부에서는 압력이 완전히 달라진다. 심해의 압력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조용히, 그러나 지속적으로 사람의 형태를 바꾼다. 이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견디던 말 하나가 박히고, 예전 같으면 흘려보냈을 장면이 오래 남는다. 작은 기척에도 몸이 먼저 긴장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미 무언가를 잃은 사람처럼 하루를 시작하게 된다.


심해는 슬픔과도 조금 다르다.

슬픔에는 방향이 있다. 그리움이라는 방향, 상실이라는 방향, 울고 나면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다는 방향. 그러나 심해는 방향을 잃은 상태에 가깝다. 위가 어디인지 아래가 어디인지, 아직 떨어지고 있는 건지 이미 바닥에 닿은 건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더 무섭다. 고통 자체보다, 고통의 좌표를 잃는 일이 사람을 더 오래 붙든다.


나는 그를 잃은 뒤보다, 그 일을 이해할 수 없게 된 뒤에 더 깊이 가라앉았다.

상실보다 난해함이 더 오래 사람을 붙잡을 때가 있다. 끝난 사랑보다 설명되지 않는 잔인함이, 이별보다 식별되지 않는 기만이, 부재보다 해석 불가능한 태도가 더 깊은 상처를 남긴다. 사랑은 끝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사랑했던 것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는 순간, 사람은 단순한 이별을 넘어 자기 인식의 일부까지 함께 잃는다. 내가 본 것이 진짜였는지, 내가 이해한 것이 틀렸는지, 내가 사랑한 대상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인지. 이런 질문들은 대답을 요구하는 것 같지만, 실은 사람을 더 깊은 곳으로 끌고 간다.


심해에서는 기억도 형태를 바꾼다.

수면 위의 기억은 순서가 있지만, 깊은 곳의 기억은 덩어리로 온다. 냄새 하나, 문장 하나, 표정 하나, 특정한 시간대의 공기, 휴대폰 화면의 밝기, 계절의 각도 같은 것들이 갑자기 한꺼번에 밀려와 몸을 적신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것 앞에서 다시 한 번 방향을 잃는다. 기억은 과거의 것이지만, 심해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잘 구분되지 않는다. 지나간 일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처럼, 끝난 장면이 여전히 내 몸속 어디선가 계속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한다. 그만 생각하라고. 잊으라고.

하지만 잊는다는 것은 단순한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심해에 가라앉은 기억은 머리로만 저장되지 않는다. 그것은 몸의 습관이 되고, 감각의 경로가 되고, 위험을 감지하는 방식이 된다. 한 번 깊은 곳을 통과한 사람은 이전처럼 가볍게 믿지 못하고, 이전처럼 쉽게 안심하지 못한다. 그것은 미성숙이 아니라 생존의 후유증이다. 몸이 먼저 배워버린 것이다. 다시는 같은 방식으로 다치지 않기 위해.


한동안 나는 내가 너무 오래 이 어둠 속에 머무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남들은 진작 올라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이쯤이면 다 잊고 잘 지낼 거라고 말할 것 같았다. 그러나 인간의 회복은 늘 비교를 거부한다. 누구는 빨리 올라오고, 누구는 오래 머문다. 누구는 다시 밝은 곳으로 나와도 이전과 거의 비슷한 얼굴을 갖고 살고, 누구는 끝내 얼굴의 골격 자체가 바뀐다. 중요한 것은 빠르기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깊이가 실제였다는 사실을 스스로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심해에서는 자주 자기 자신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다가도 모르겠어졌다. 예전의 나는 타인을 오래 이해하려 했고, 의미를 찾으려 했고, 견딜 수 있는 쪽으로 해석하려 했다. 그러나 깊은 곳에서의 나는 그런 사람과 달랐다. 더 무심했고, 더 차갑고 싶었고, 더 빨리 식별하고 더 빨리 돌아서고 싶었다. 때때로 나는 그 변화가 타락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것은 타락이 아니라 적응이었다. 너무 깊은 곳을 통과하고도 예전의 수압으로만 살 수는 없다.


심해의 생물들이 이상한 형태를 갖는 것은 이유가 있다.

그곳에서는 아름다움보다 생존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눈이 퇴화하고, 피부가 바뀌고, 기관이 변형된다. 낯설고 기괴해 보이는 것은 그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장 정확해진 결과일 뿐이다. 인간도 그렇다. 어떤 어둠을 통과한 뒤에는 감정의 형태가 바뀐다. 전처럼 쉽게 웃지 못하고, 전처럼 단숨에 믿지 못하고, 전처럼 무방비하게 사랑하지 못한다. 그것이 꼭 나빠진 것만은 아니다. 때로 그것은 내가 살아남았다는 증거다. 찢기고도 계속 숨 쉬기 위해 몸이 새로 짠 구조다.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작은 신호가 더 중요해진다.

심해의 생물들이 미세한 진동과 온도의 차이를 감지하듯, 나 역시 아주 작은 것들에 예민해졌다. 말의 결, 망설임의 위치, 시선이 미끄러지는 순간, 다정함 속에 숨어 있는 무관심, 배려처럼 보이지만 실은 책임을 피하는 태도. 예전에는 지나쳤을 것들을 이제는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한때 나는 그것을 피로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것은 감각이 망가진 것이 아니라 정교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 정교함이 기쁨보다 경계에 먼저 복무하게 되었을 뿐이다.


심해는 사람을 외롭게 만든다.

깊은 곳의 경험은 쉽게 공유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설명하려 해도 말은 얕아지고, 듣는 사람은 대개 자기가 아는 슬픔의 틀 안에서만 그것을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모든 고통은 같지 않다. 어떤 고통은 울면 가벼워지지만, 어떤 고통은 울고 나서도 구조가 남는다. 어떤 고통은 시간이 지나면 기억으로 밀려나지만, 어떤 고통은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뼈대가 선명해진다. 내 고통이 특별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흔한 위로의 문장 안에는 잘 들어가지 않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혼자 가라앉는 법을 배웠다.

아무도 손을 내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손이 닿을 수 없는 깊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위로는 잠깐 수면을 떠올리게 할 수는 있어도, 실제로 나를 끌어올리지는 못했다. 결국 견디는 법은 내 몸이 배워야 했다. 오늘 하루를 버티는 법, 갑자기 밀려오는 기억을 통과하는 법, 아무 이유 없이 무너지는 저녁을 지나가는 법, 숨이 막힐 때 물을 마시고 창문을 열고 불을 끄고 다시 눕는 법. 회복은 거창한 통찰이 아니라 이런 하찮고 반복적인 동작들 속에서 조금씩 형태를 얻는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가장 깊은 곳에서는 어떤 정직함이 생긴다.

수면 위에서는 사람도 관계도 자주 반짝임으로 포장된다. 우리는 기대를 사랑으로 착각하고, 이해를 신뢰로 착각하고, 오래 견딘 마음을 진실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그런 장식들이 버텨주지 못한다. 결국 남는 것은 본성에 가까운 것들이다. 누가 끝까지 잔인했는지, 누가 무너진 사람 앞에서 더 가해졌는지, 누가 사랑을 말하면서 실은 자기 욕망만을 관철했는지, 그리고 나는 무엇을 잃었는지. 심해는 어둡지만, 때로는 그 어둠 때문에 오히려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나는 이제 안다.

심해는 단지 절망의 장소가 아니었다. 그곳은 식별의 장소이기도 했다. 내가 무엇을 사랑이라 불렀는지, 무엇을 끝까지 인간적 태도라고 믿었는지, 무엇이 실은 결코 나를 살리지 못할 것들이었는지, 그 어둠 속에서 비로소 드러났다. 너무 늦게 알게 된 것들도 많지만, 늦게 알게 된 진실이 진실이 아닌 것은 아니다.


물론 나는 아직도 완전히 올라오지 않았다.

어떤 날은 여전히 빛이 너무 멀고, 어떤 기억은 여전히 내 발목을 잡는다. 어떤 문장은 아직도 내 안에서 제대로 썩지 못한 채 남아 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심해에 오래 있었다고 해서 그곳이 나의 최종적인 주소는 아니라는 것을. 깊은 곳은 나를 바꾸었지만, 나를 전부 삼키지는 못했다.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생명은 존재한다.

아니, 어떤 생명은 오히려 그곳에서만 자기 구조를 완성한다. 나는 예전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이다. 예전처럼 맹목적으로 믿지도 못할 것이고, 예전처럼 내 손을 쉽게 내주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파멸은 아니다. 그것은 압력을 통과한 존재가 갖게 되는 새로운 호흡이다.


어둠은 나를 망가뜨렸지만, 동시에 가르쳤다.

내가 견딜 수 없는 것과 끝내 견디는 것을.

내가 잃어버린 것과 아직 남아 있는 것을.

내가 다시는 허락하지 않을 것과, 그래도 끝내 포기하지 않을 것을.


심해는 빛이 닿지 않는 곳이다.

하지만 빛이 닿지 않는다고 해서, 거기에 아무 생명도 없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그곳에 있었다.

오래 가라앉아 있었다.

방향도 없이, 설명도 없이, 구조 요청조차 하지 못한 채.


그런데도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아마 다음은, 그 깊은 곳에서 다시 떠오르기 시작하는 기억의 일일 것이다.

가라앉은 것은 끝난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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