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큰 사건보다 이상한 장면들로 돌아왔다.
그때는 그냥 지나갔고, 굳이 붙잡아 해석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던 순간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알게 됐다. 나를 지치게 한 것은 단 한 번의 파열이 아니라, 그런 장면들이 남긴 미세한 찌꺼기였다는 것을.
한 번은 술에 취해 전화를 해왔다.
자기 같은 사람을 견뎌줘서 고맙다고 했다. 처음에는 드물게도 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좀 돌아보는 줄 알았다. 그런데 듣고 있자니 이상했다. 그 말은 내게 하는 감사처럼 들리면서도 끝내 나를 향해 있지는 않았다. 내가 무엇을 견뎠는지, 왜 지쳤는지, 자기의 어떤 태도가 사람을 닳게 만드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감각도 없었다. 그저 자기 삶 어딘가에서 밀려온 죄책감을 잠깐 내 앞에 쏟아놓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별 희한한 놈이구나.
그래서 내가 말했다.
개복치 같다고.
깊게 흔들리는 얼굴을 할 줄은 알지만, 그 흔들림을 삶의 태도로 바꾸지는 못하는 사람. 자기 파동에 자기가 먼저 찢기면서도, 주변이 함께 닳아간다는 사실은 끝내 모르는 사람. 그 이름이 이상하리만큼 잘 맞았다.
타국에서 긴 다리를 함께 걸어 건넌 적도 있었다.
나는 평발이라 오래 걷는 걸 잘 못하는데도 몇 킬로를 걸었다. 목적지는 다리 건너편의 빈티지 시장이었다. 그런데 반대편에서 한 노인이 오고 있었다. 정확히 어떤 병인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사람이 거의 몇 센티씩, 몸을 겨우 옮기듯 아주 천천히 그 긴 다리를 건너오고 있었다는 사실뿐이었다. 보호자도 없이, 혼자서.
그 장면보다 더 선명하게 남은 것은 그걸 바라보던 그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는 무언가가 복잡하게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연민이었는지, 두려움이었는지, 순간적인 비애였는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그는 그 노인의 걸음을 그냥 보지 않았다. 자기 안에서 어떤 상념들이 크게 일어난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때의 나는 그걸 보고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아, 저 사람도 저런 장면 앞에서는 뭔가를 느끼는구나, 그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오히려 그 장면이 더 선명해졌다. 사람은 어떤 풍경 앞에서 크게 흔들릴 수는 있어도, 그 감각이 곧 삶의 태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늘 다정한 외피를 갖고 있었다.
겉으로는 부드럽고, 호의적이고, 챙길 줄 아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다정함은 끝내 상대를 향해 있지 않았다. 오랜 시간을 알고 지낸 사람이라면 알 법한 것들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내가 어떤 취향을 갖고 있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불편해하는지, 어떤 방식이 나를 편안하게 하고 어떤 방식이 나를 지치게 하는지. 그는 나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끝내 나를 아는 방식으로 행동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더 피곤했다.
노골적으로 거칠거나 악의적인 사람은 차라리 단순하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늘 외향이 다정하다. 그래서 내가 불편해도 내가 예민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화를 내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괜찮다고 넘기기에는 자꾸만 닳는다. 나는 화 대신 자주 피로했고, 짜증났고, 돌아서고 나면 꼭 쓸데없이 진이 빠졌다.
이제 와 생각하면 나도 비겁했다.
단 한 번도 제대로 화를 내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건 꼭 비겁해서만은 아니었다. 화는 아직 기대가 남아 있을 때 나는 법이다. 나는 어쩌면 너무 일찍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저 사람에게는 내 분노를 줄 만큼의 가치도, 내 감정을 정확히 받을 능력도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짜증나는 순간들이 참 많았다.
꼭 큰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사소한 말 한마디,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반응, 사람을 편하게 해주기는커녕 이상하게 긴장시키는 태도. 그런 것들이 하나씩 쌓였다. 그때는 그저 불편하다고만 느꼈는데, 지금 돌아보면 전부 경고였다. 나는 왜 같은 말을 반복해야 했는지, 왜 같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혼자 벽을 밀고 있는 느낌이 들었는지, 왜 돌아서고 나면 꼭 쓸데없이 축나는 기분이 들었는지.
그건 단순히 대화가 안 통해서가 아니었다.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방식의 둔함이었고, 상대를 보지 못하는 방식의 딱딱함이었고, 굳이 만들지 않아도 될 피로를 계속 만들어내는 미련함이었다.
나는 원래 그런 식으로 사람에게 오래 붙들리는 타입이 아니다.
삽질도 잘 안 한다. 한 번 아니다 싶으면 식별하는 편이고, 대체로 운이 좋은 사람으로 살아왔다. 어디를 가도 환대를 받는 편이었고, 사람들은 내 앞에서 대개 다정했다. 그게 내가 특별히 요구해서가 아니라, 내가 마주한 사람들 대부분이 자기의 괜찮은 얼굴을 자연스럽게 꺼내 보였기 때문이다. 나중에야 알게 됐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내가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적어도 사람에게서 함부로 굴 이유를 만들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대체로 사람들은 내 앞에서 자기의 좋은 면을 보여주었다는 것을.
그래서 더 늦게 알아봤는지도 모른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둔하고 딱딱할 수 있다는 것을. 순간순간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을 하고서도, 정작 가까운 사람 하나를 편안하게 해주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자기 결함을 말하면서도 끝내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의 역습은 그래서 낭만이 아니었다.
뒤늦은 식별이었다.
그때는 그냥 지나갔던 장면들이 돌아와 제 이름을 가졌다.
아, 저건 위험이었다.
아, 저건 짜증이었다.
아, 저건 사랑이 아니라 사람을 닳게 하는 시간이었다.
개복치라는 이름은 우스워 보이지만, 사실은 정확한 진단이었다.
깊게 흔들리는 얼굴을 할 줄은 알지만, 그 흔들림을 삶의 태도로 바꾸지는 못하는 사람. 자기 파동에 자기가 먼저 찢기면서도, 주변이 함께 닳아간다는 사실은 끝내 모르는 사람.
나는 이제 안다.
왜 어떤 대화들은 끝난 뒤에도 몸에 찌꺼기처럼 남았는지.
왜 어떤 장면들은 한참이 지난 뒤에야 위험으로 읽혔는지.
왜 나는 결국 그 자리를 빠져나와야 했는지.
기억은 늦게 왔지만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한 번 식별한 이상, 다시는 모른 척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