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아스 라인〉을 보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성 서사라는 말을 쉽게 좋아할 수 없다. 남성의 이야기는 그냥 인간의 이야기처럼 유통되는데, 여성의 이야기는 늘 따로 분류되고, 명명되고, 설명되어야 하는 것처럼 취급되기 때문이다. 남성 서사라는 말은 거의 쓰지 않으면서 여성 서사라는 말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쓰인다. 그 말 자체가 이미 누가 보편의 자리를 차지해왔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그 명명이 불편하다.
그런데도 동시에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저런 영화들이, 저런 이야기들이, 지금까지도 필요했다는 것을. 이름 붙이지 않았다면 너무 많은 것이 계속 지워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불편해하는 것은 여성 서사 자체라기보다, 아직도 여성만 수식어를 달고 보편 바깥에 서 있어야 하는 세계의 구조에 가깝다.
문제는 영화나 문학 같은 매체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성은 작품을 볼 때만 여성이 아니다. 하루를 살아가는 동안 이미 여성으로서 세계를 통과하고 있다. 길에서, 직장에서, 집 안에서, 관계 속에서, 말투와 시선과 농담과 침묵 속에서. 전염되지 않은 부분이 없고, 오염되지 않은 부분이 없다. 그러므로 여성에게 현실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미치지 않고서는 견디기 어려운 상황들의 연속으로 다가온다. 예민해지고, 지치고, 경계하고, 무감각해지고, 또 스스로가 틀린 건가 의심하게 된다. 그래서 이 문제는 감상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가 된다.
먼저 상정해야 할 것이 있다. 바깥이 없다는 사실이다. 가부장제는 어떤 특정 남성 몇 명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관계와 언어와 도덕의 기본값처럼 스며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 안에 젖어 있으면서도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지하더라도 굳이 구분하지 않는 편을 택한다. 구분하는 순간 삶 전체를 다시 봐야 하기 때문이다. 남성 서사라는 말이 잘 쓰이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것은 오래도록 전체를 대표하는 얼굴처럼 유통되어 왔고, 그래서 여성의 이야기는 늘 별도의 항목처럼 불려왔다.
가족을 비판하는 일이 특히 어려운 것도 그래서다. 가족은 가장 가까운 사랑의 단위이면서 동시에 가장 오래된 권력의 단위이기 때문이다. 밖의 권력을 비판하는 것보다, 나를 낳고 먹이고 키운 관계 안의 구조를 바깥으로 발화하는 일은 훨씬 어렵다. 그 순간 비판은 너무 쉽게 폐륜이라는 이름으로 되돌아온다. 문제는 그 말이 너무 자주 구조를 보호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나는 남성 개인에게 직접 폭력을 당하지 않았다고 해서 가부장제의 바깥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여성들에게서 폭력을 겪은 적이 있다. 언니들, 여성 어른들, 여성들 내부의 위계와 감시와 억압. 그러나 그것이 곧바로 가부장제와 무관하다는 뜻은 아니다. 여성들 내부에도 층위가 있고, 지위가 있고, 남성 중심의 질서를 더 충실히 수행하며 생존해온 여성들이 있다. 그래서 여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조차 종종 가부장제의 바깥이 아니라 그 내부에서 발생한다. 어떤 폭력은 남성의 얼굴로 오고, 어떤 폭력은 여성의 얼굴로 온다. 그러나 둘 다 같은 질서의 다른 수행일 수 있다.
내 삶의 기저에 오래 깔려 있던 것은 불안이었다. 믿을 수 있는 존재란 끝내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그래서 나는 신화 속에서조차 일방적으로 당하는 장면보다, 동등한 폭력성이 맞부딪히는 장면에서 묘한 해방감을 느꼈던 것 같다. 메데이아와 사이렌 같은 오래된 이야기들을 다시 들춰보게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 안에는 인간이 무엇을 두려워했고, 무엇을 은폐해왔는지가 남아 있다. 신화는 낡은 문학이 아니라 오래된 증거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인류가 어떤 사고의 흐름을 통해 지금까지 왔는지, 어떤 여성상을 두려워하고 동시에 만들어왔는지 그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현실은 그보다 덜 잔인하지 않다. 어떤 날은 여성이 남성을 연쇄로 죽였다는 뉴스를 보고, 또 어떤 날은 전자발찌를 찬 남성이 여성을 죽였다는 뉴스를 본다. 그러면 나는 더 이상 선악의 단순한 도식으로는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고 구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구조는 더 깊은 층위에서 작동한다. 여성이 가해자가 되는 사건이 나온다고 해서 가부장제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남성 폭력의 반복이 우연이 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끝내 놓지 못하는 것은, 이 폭력의 세계 안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일이 늘 더 쉽게 오염되고 더 쉽게 침범된다는 감각이다.
아마 그래서 어떤 여성들은 여성과 결혼한다. 이것은 단순히 성적 지향의 문제로만 읽히지 않는다. 어떤 여성에게 그것은 살아남는 방식이고, 덜 침범당하는 관계의 형식이며, 더 믿을 수 있는 공동생활의 모양일 수도 있다. 그런데 해외에서는 합법적인 결혼이 한국에 들어오는 순간 제도적으로 승인되지 않는다는 뉴스를 보면, 나는 다시 묻게 된다. 국가는 도대체 무엇을 가족으로 인정하는가. 누구의 안전만을 정상이라 부르고, 누구의 삶만을 제도 안으로 들이는가. 여성은 남성과의 관계 안에서 반복적으로 안전을 상실해왔는데, 여성과 여성의 결합조차 여전히 온전한 삶의 형식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면, 이 사회는 대체 누구의 불안을 정상으로 삼고 있는가.
그래서 나는 여성 서사라는 말을 쉽게 버릴 수도, 쉽게 받아들일 수도 없다. 그 말은 필요했지만, 동시에 여성을 다시 특수한 항목으로 밀어 넣는 이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불편한 것은 그 이름 자체라기보다 그 이름이 아직도 필요하다는 현실이다. 남성의 경험은 여전히 인간 일반의 얼굴로 유통되고, 여성의 경험은 설명되어야 할 것으로 남는다. 드러난 시선만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를 보편처럼 숨기는 시선 또한 정치적이다. 나는 그 은폐를 지나칠 수 없다. 아마 내가 여성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더 빨리 알아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성이라서 예민한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살아오며 무엇이 보편으로 위장되어 왔는지 반복해서 보아왔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단순하지 않다. 나는 여성 서사라는 말이 불편하다. 그러나 그 불편함은 그 말이 쓸모없어서가 아니라, 아직도 여성만 그렇게 따로 불려야 하는 세계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생긴다. 저런 영화들은 필요했다. 지금까지도. 그리고 지금도 나는 안다. 작품 속에서만이 아니라 삶 전체에서, 여성은 이미 그 서사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사람은 영화 밖에서 이미 젖어 있다.
그래서 어떤 영화는 감상이 아니라, 뒤늦게 자기 삶의 오염도를 확인하는 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