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위로가 아니라 균열이어야 한다
카프카는 말했다.
책은 우리 안에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고.
나는 이 문장을 위로로 읽지 않는다.
이건 독서의 미학이 아니라 글쓰기의 조건에 가깝다.
도끼는 설명하지 않는다.
도끼는 설득하지 않는다.
도끼는 합의를 구하지 않는다.
도끼는 단지 내려쳐서, 깨진 이후의 상태만 남긴다.
그래서 도끼는 위험하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로, 나는 도끼가 아닌 글을 믿지 않는다.
윤리적으로 안전한 글은 독자를 보호한다.
상처받지 않도록 말을 고르고,
누구도 특정되지 않도록 주어를 흐리고,
갈등이 폭발하기 직전에 문장을 접는다.
그 글은 친절하다.
그러나 그 친절은 종종
우리 안의 바다가 계속 얼어 있도록 허락하는 방식이다.
얼어붙은 상태는 고통스럽지 않다.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움직이지 않는 대신
아무것도 건너가지 못한다는 데 있다.
카프카의 글에는 안전장치가 없다.
『변신』에서 그레고르 잠자는
왜 벌레가 되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누구의 잘못인지도 말하지 않는다.
회복의 가능성조차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그냥 벌레다.
그리고 독자는 그 사실 앞에 방치된다.
이 방치는 잔인하다.
그러나 정확하다.
그 순간 독자는 더 이상
윤리나 공감 뒤에 숨을 수 없다.
바다가 깨지는 지점은
항상 독자의 내부다.
도끼는 글쓴이에게도 안전하지 않다.
도끼를 드는 순간,
글쓴이는 자기 위치를 걸어야 한다.
• 이 문장을 써도 관계가 유지될 것인가
• 이 선택을 밝혀도 되돌아갈 수 있는가
• 이 말을 한 이후에도 나는 같은 사람으로 남는가
도끼는 이런 질문을 무시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도끼를 든 글은
대개 오래 망설인 뒤에야 나온다.
쉽게 쓰이지 않는 글만이
깨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공감을 목표로 한 문장을 불신해왔다.
이제는 그 이유를 조금 더 정확히 말할 수 있다.
그 문장들은
얼어붙은 바다 위에
미끄럼 방지 매트를 깔아주기 때문이다.
넘어지지 않게 해주지만,
얼음을 깨지는 않는다.
도끼는 다르다.
도끼는 넘어지게 만든다.
그리고 그 이후에야
사람은 자기가 어디에 서 있었는지를 알게 된다.
그래서 나는 글을 읽을 때 묻는다.
이 글은 나를 이해시키는가,
아니면 나를 건너가게 하는가.
이 글은 나를 안심시키는가,
아니면 내 안의 정지를 파열시키는가.
도끼가 아닌 글은
옳을 수는 있다.
그러나 나를 이동시키지는 못한다.
나는 이동이 일어나지 않는 글을
좋은 글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글은 위로가 아니라
균열이어야 한다.
카프카가 말한 도끼는
누군가를 다치게 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그건 우리 안에서
오래 얼어붙어 있던 것을
더 이상 그대로 두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그래서 나는,
도끼가 아닌 글을
끝내 믿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