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은 번외편이다.
치기 어린 표현이 있다.
뭐, 나도 깡 좀 부려보자.
지위는 행동으로 증명된다
이 글은
선언을 위해 쓰이지 않는다.
이미 지나온 과정에
이름을 붙이기 위해 쓰인다.
나는 내 직업을 묻는 질문에
그냥 자영업자라고 말한다.
꽃가게를 하니까,
꽃을 판다고 말한다.
실제로는
독학으로 버텨야 하는 상황들이 많았고,
그래서 이렇게 살아왔다.
이런 일들은
어디 가서 쉽게 말할 수 있는 종류의 이야기가 아니다.
언어화해도 전달되지 않고,
설명할수록 오해가 늘어나는 사안들이다.
그래서 나는
말하기보다
일하는 쪽을 선택해 왔다.
비교 대상이 없어서 고립되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닌 것 같다.
나는 내 전공 분야에서
끝까지 공부를 했던 사람이고,
학문이라는 건 결국
다른 길을 돌아도
한 지점으로 모이게 되어 있다.
배움이 많을수록
사람은 겸손해진다.
나는 겸손하다 못해
그냥 험블한 편이다.
그래서 말이 없어진 건지도 모른다.
꼭 말해야 할 상태가 아니면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를 오래 본 사람들은
다르게 인식하는 것 같다.
몇십 년을 지켜본 끝에
내공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묻는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모두가 세입자인 것도 아니고,
모두가 임대인인 것도 아니다.
세입자이면서
임대인이기도 한 경우들이 있고,
그 지점에서는
변호사를 써도,
대리인을 써도
답이 잘 나오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알게 모르게
재야의 고수가 되어버린 셈이다.
2025년은
내공에 맞게
나의 비주얼도 변천사를 겪은 해였다.
원래도
그다지 훌륭한 외관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백발마녀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어금니 하나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한계에 도달했다.
아프다기보다는
더는 버티지 않겠다는 신호에 가까웠다.
몸이
먼저 결론을 낸 셈이다.
그런데도
얼굴에 주름은 없다.
그래서
처음 보는 사람들은
내 나이를 잘 짐작하지 못한다.
설명하지 않으면
알아보지 못하는 종류의 시간들이 있다.
이건
그런 시간에 가까웠다.
1년은
정말 순식간에 지나갔다.
눈을 깜빡인 사이에
그냥 지나가 버린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른 게 아니라
통과해 버린 느낌이었다.
미친 듯이
서면을 쓰고 있었고,
그 사이
계절이 바뀌었다.
올해는
원래 하고 싶었던 일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내 것이 아니었다.
이 썽썽하지 못한 한 몸으로
내가 몇 개의 트랙을 동시에 감당해 왔는지,
가끔은
트루먼 쇼를 찍어도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이걸
누가 좀 봐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증명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존재했다는 사실 정도는
남아도 되지 않나 싶어서다.
그래서
그동안 나가지 못했던 성당에도
올해는 다시 가볼까
생각 중이다.
세례를 받고,
견진까지 받은
나름 성숙한 신자인데
지난 5년은
냉담해서가 아니었다.
주말에도
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너덜너덜하다.
돌이켜보면
너덜너덜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내 삶 자체가 그랬다.
누군가는
금수저를 물었네,
네가 무슨 고생을 알아,
그런 말을 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말에
대응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이제
결론을 말할 수 있다.
나는
트레이닝복에 슬리퍼를 신고
집 앞 앞마당을 쓸고,
방을 치우고,
세입자가 테러를 일으킨 화장실을
구역질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청소하던 사람이었다.
그 장면만 놓고 보면
누군가는
을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손이 많이 가는 일을 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건 지위를 오해한 판단이다.
갑이라는 것은
편한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명령하는 사람을 뜻하지도 않는다.
갑이라는 것은
책임이 끝까지 귀속되는 위치를 말한다.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
응답을 끊지 않았다.
절차에서 이탈하지 않기 위해
필사의 정신력을 소진하며
끝까지 버텼다.
이 일은
1인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이미 넘어선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은
개인에게 벌어져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자리를 지켰고,
책임을 내려놓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청소를 하는 사람이었고,
관리하는 사람이었고,
결정을 감당하는 사람이었다.
이게
갑이다.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힘을 과시하지 않아도,
위에서 군림하지 않아도
갑은 성립한다.
지위는
호칭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서류로 완성되지도 않는다.
행동으로만 증명된다.
그래서 나는
뼛속까지
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