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나서기 전에 생각해야 할 것들

by Peppone



한국에서 아파트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1960년대였다.

1970~80년대를 거치며 아파트는 ‘근대적 주거’의 상징이 되었고,

1990년대 이후에는 선택이 아니라 표준이 되었다.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다수의 사람들은

문을 닫으면 외부와 단절되고,

현관을 나서면 곧장 익명 속으로 들어가는 공간에서 산다.


이 감각이 너무 오래 반복되다 보니

사람들은 그것이 주거의 유일한 방식이라고 착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파트가 표준이 되기 전에도 사람들은 살았고,

지금도 아파트가 아닌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상가주택은 그런 공간 중 하나다.

생활과 거리,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시선이

얇은 경계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는 구조.


나는 이런 공간에서

어릴 때부터 살아왔다.

이건 선택이나 실험이 아니라

그냥 삶의 조건이었다.


문제는 아파트가 표준이 된 이후,

이런 주거 형태가 점점 이해되지 않는 방식으로 취급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보이면 열려 있는 것으로,

보이면 말을 걸어도 되는 것으로,

보이면 관계가 이미 시작된 것으로

오해되기 시작했다.


문제는 시선이다.

시선은 결코 중립적인 감각이 아니다.

보는 쪽과 보이는 쪽이 나뉘는 순간,

시선은 위치가 되고,

그 위치는 곧 권력으로 변한다.


아파트의 내부는

시선을 차단하도록 설계된 구조다.

그래서 그 안에서의 삶은

자연스럽게 보호된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설명할 필요도, 증명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상가주택에서는 다르다.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설명이 요구되고,

침묵은 무례로 오해되며,

존재는 검증의 대상이 된다.

보는 쪽은 질문할 수 있다고 믿고,

보이는 쪽은 대답해야 할 것처럼 취급된다.

이때 시선은 관찰이 아니라 개입이 된다.


이 불편함은 요즘 ‘젠지 스테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말없이 빤히 바라보는 시선.

대화를 시작하지도 않으면서

상대를 평가대 위에 올려놓는 눈길.

사람들이 그 시선을 불쾌해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 안에는 관계의 의지도, 존중도 없고

본다는 사실만으로 위에 서려는 태도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상가주택에서 살다 보면

말은 대체로 이렇게 시작된다.


“전에 너를 봤다.”

“나는 너를 안다.”

“여기 사는 거 아니냐?”

“왜 불을 켜지 않느냐?”


말은 질문처럼 던져지지만

실은 확인이 아니라 점검에 가깝다.

이미 판단을 끝낸 상태에서

입으로 옮겨진 말들이다.


취객이 섞이면 말은 더 노골적이 된다.

소변을 보며 중얼거리듯,

혹은 일부러 들리게.


“너는 여기 살지 말아라.”

“네가 어떻게 이 건물의 주인이냐?”


이 말들은 사실을 묻지 않는다.

자격을 묻고, 위치를 정하려는 말이다.

누가 여기 있어도 되는지,

누가 설명해야 하는지,

누가 물러나야 하는지를

허락 없이 재단한다.


그래서 내가 묻게 된다.

“저 아세요?”


그러면 돌아오는 대답은 이렇다.

동네에 물어서 알았다고 한다.

그 말 뒤에 질문이 이어진다.


“결혼 안 했지 않느냐.”

“왜 결혼을 안 했느냐.”


이 질문들은 관심이 아니다.

사생활을 묻는 척하며

거주 자격을 심문하는 말이다.

결혼 여부가

이 공간에 있어도 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가르는 기준처럼 사용된다.


어이가 없어서 대답을 하지 않으면

이번에는 침묵이 문제로 지적된다.


“왜 말을 안 하느냐?”


그래서 차분하게, 논리적으로 말하면

이번에는 말의 방식이 문제로 바뀐다.


“배운 년 같은데?”

“욕을 왜 이렇게 잘하느냐?”


욕을 한 적도 없고,

고성을 지른 적도 없다.

무엇을 해도 문제가 된다.

말을 하지 않아도 문제고,

말을 해도 문제다.

이건 대화가 아니라

출구가 없는 심문이다.


어중간하게 끼어 있는 세대인 나는

굳이 생년으로 따지면

어디에도 정확히 속하지 않는다.

위에서는 낡았다고 하고,

아래에서는 꼰대라고 하고,

그래서 사방이 그 모양이다.


그러다 보면 또 다른 이름이 붙는다.

영포티.

젊은 척하는 중년이라는 뜻으로 소비되는 말.

이 말이 억울한 이유는 분명하다.

그 안에는 개인의 태도나 선택에 대한 이해는 없고,

보이는 것만으로 사람을 재단하려는 시선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보이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보는 것을 말한다.

입고 있는 옷이나 외형이 아니라,

내가 실제로 보고,

듣고,

체험한 것만을 말한다.


이런 일들을 너무 비일비재하게 겪다 보니

사실 나는 이미 정신이 나갔어야 한다.

그런데도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비정상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대신 남은 게 하나 있다.

나는 가만히

내 집 안에 앉은 자리에서

세상을 본다.

문을 나서지 않아도,

뉴스를 보지 않아도,

거리의 말투와 시선의 온도로

지금 이 사회의 상태를

거의 실시간으로 체감한다.


이건 분석이 아니라

체경이다.


그래서 이 글은

분노의 기록이 아니다.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글도 아니다.

아파트라는 표준이 만든 감각과,

그 표준 밖에서 살아온 삶 사이의

어긋남을

이 자리에서 본 사람이 남기는 기록이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나는 당신들을 모른다.

내가 이 공간에 산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게 접근권이나 발언권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나는 오늘도

문을 나서기 전에

이것들을 생각한다.



(이미지 설명)

보이면 오해되기 시작했다.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열려 있다고 판단되고,

말을 걸어도 되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보는 쪽의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말하지 않으면서도

상대를 평가하고,

머무를 자격을 가늠하는 방식이다.


시선은 언제나 무게를 가진다.

특히 반복될 때,

그 시선은 관찰이 아니라 감시로 체감된다.


그래서 나는 이 장면들을

‘분노의 증거’가 아니라

생활의 기록으로 남긴다.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도 아니라,

그저 이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을

왜곡 없이 남기기 위해서다.


이 사진들은 특정인을 고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하루 이틀의 우연을 과장하려는 의도도 없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대,

같은 방식의 대기가 반복되었고,

그 반복이 일상의 배경이 되었기 때문에 기록했다.


카메라는 감정을 확대하지 않는다.

서 있는 시간과 위치만을 남긴다.

누군가 말없이 머무르고,

지켜보고,

떠나지 않는 장면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뿐이다.


이 기록이 말하는 것은

개인의 성향이나 사연이 아니라

공간과 시선의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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