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개장과, 조용한 사람의 기록
요즘 내가 가장 자주 쓰는 단어는
내 이름도, 직업도 아니다.
내 주소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해서
내가 사는 지역과 주소를
문장 안에 계속 적고 있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서
이 블랙 코미디는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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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에 있었던 일이다.
주정차 위반 세 건이 있다.
차를 세운 사람은 나였고,
차의 소유주도 나였다.
이건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장소는
내가 사는 집 앞 공공도로였다.
법적으로 위반이 성립한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이 장면의 핵심은
위법 여부가 아니다.
위반 장소가 ‘내 주소지’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맥락은 사라지고,
상황은 삭제되고,
주소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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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한 건은
정말 말 그대로 잠깐이었다.
급한 생리 현상 때문에
집 앞 공공도로에 차를 세웠다.
그 사이
아주 날랜 손이
사진을 찍어 두었다.
나는 즉시
근처 유료 주차장으로 차를 옮겼다.
말 그대로 잠깐이었다.
나는 변비가 없다.
그런데 그 장면은
사진 한 장으로 고정돼
시간을 건너
‘위반’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왔다.
사정은 사라지고,
주소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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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더 웃긴 장면이 있다.
내 양옆 건물,
내 앞 건물들은
자기 차를 막 주차한다.
도로에다가.
상시다.
습관처럼.
나는 그걸
사진 찍지 않는다.
신고하지 않는다.
사람 사는 동네니까.
그럴 수 있으니까.
그런데
나는 신고를 당한 것 같다.
잠깐 똥을 싸러 간 사이에.
나는 그날
똥을 싸고 나왔고,
누군가는
행정에 접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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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부터
장르는 자연스럽게 SF로 넘어간다.
어느 날
지자체가 내 건물 길이를 쟀다.
8미터.
그래서 80만 원.
고지서는 없었다.
납부서도 없었다.
계좌도 없었다.
대신
현금으로 달라고 했다.
“이건 같이 가야 된다”는 말도
함께 들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건설과의 한 계장이었다.
나는 그를
김계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계장이긴 한데,
내 기억 속에서는
김개장이다.
그날의 말과 태도가
그 이름을 만들었다.
조롱이 아니라
기억 방식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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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사이
내 건물 앞에 있던
비싼 오브제와 화분들이
사라졌다.
통보도 없었고,
보관 장소 안내도 없었고,
반환 절차도 없었다.
그냥 없어졌다.
그래서 나는
진지하게 궁금해졌다.
저건 어디로 갔을까.
혹시 팔았을까.
당근마켓에 올렸으면
그게 얼만데.
팔리고도 남았을 텐데.
이쯤 되면
돈을 내가 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지자체가 나에게 줘야 하는 건지
헷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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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타는 이거다.
나와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담벼락이 붕괴했다.
위치도 다르고,
소유도 다르고,
아무 관계도 없다.
그런데
그 구상권 청구가
나에게 왔다.
지자체는
내 주소와
내 개인정보를
보험사에 제공했다.
동의도 없었고,
사전 통지도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무너진 담벼락의 책임자가 되어 있었다.
이게 정말
2025년에 가능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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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사람들이 하나쯤은
알아두면 좋겠다.
나는 원래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그랬고,
태어났을 때부터 그랬다.
우리 엄마는
아기가 울지를 않아서
걱정했다고 한다.
혹시 벙어리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조용했다고.
내가 태어났을 때
몸무게는 4.3킬로였다.
아빠는 독설가였는데,
그날만큼은
“거대한 똥을 엄마가 누웠다”라는
이상하게도 정직한 표현을 썼다고 한다.
형제 다섯 중 막내였고,
나는 잘 먹는 아이였다.
거버 이유식도,
치즈도,
모유도 잘 먹었다.
그래서 동글동글했고,
귀여웠고,
나이 차이가 커서
무조건 귀여움을 받는 위치였다.
형제들과
나쁜 사이일 이유는 없었다.
거리를 두었다면
그건 누군가가 밀어낸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둔 거리다.
말 못 하는 갓난아기였던 나를
분유 회사에서
아기 모델로 쓰고 싶다며
부모를 설득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엄마가 반대했다.
딸아이는 그러면 안 된다,
괜히 사람들 눈에 오르내리게 할 필요 없다,
혼삿길이 막힌다.
그래서 나는
유명해지지 않았다.
조용한 아이로,
그 자리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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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싸우고 있지 않다.
요구하고 있지도 않다.
그저
아주 오래전부터 지켜온
일관된 태도를
계속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법과 질서를 지키고,
책임을 갖고,
가만히 살아온 사람으로서.
내가 아주 예쁘고
관심을 환장하게 받고 싶어 하는 관종이라면 모를까,
실상 나는
만사가 귀찮은
과묵한 동양 노인에 가깝다.
그래서
알고 싶지도 않은 자들이
나를 마구 아는 척하는 현실이 되었다.
길가 집에 산다는 것의 비애다.
이렇게까지
관심받고 싶었던 건 아닌데.
불효자는 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