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뭐 돼?”
나는 평온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예고도 없이 공무원들이 찾아와 내 건물 앞에서 줄자를 폈다.
설명은 없었고, 질문할 시간도 없었다.
“8미터니까 80만 원입니다.”
결론이 먼저였고, 절차는 없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이건 단속이 아니라 통보라는 걸.
행정은 이미 선을 그어놓았고,
시민은 그 선을 사후에 전달받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이 경험은 예외가 아니었다.
동구청에서 반복된 일들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이 도시 행정이 쓰는 문법처럼 느껴졌다.
질문은 번거로운 것으로 취급되고,
절차는 비용이라는 말로 생략된다.
대신 결정은 빠르고, 되돌릴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되는 일이 없다.
될 일도 안 된다.
청년들이 떠나는 이유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인구가 140만을 넘었는지, 이미 무너졌는지는 부차적이다.
중요한 건 이 도시가 사람을 설득하지 않는 방식으로 굴러간다는 인식이다.
도시는 숫자로 먼저 비워지는 게 아니라,
신뢰부터 비워진다.
이 문법은 작은 지자체에서만 멈추지 않는다.
며칠 전까지 논의 중이던 사안이
며칠 만에 기정사실이 되어 발표된다.
절차는 어렵고 비용이 든다며 건너뛰고,
결론은 속도라는 이름으로 밀어붙인다.
질문은 사후로 미뤄지거나, 아예 사라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책보다 태도를 먼저 읽는다.
개인의 성향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설명 없는 독주가 반복될 때,
현실은 스스로 은유를 만들어낸다.
사람들이 특정 드라마의 장면을 떠올리게 되는 이유도
인물의 인격 때문이 아니라,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는 권력의 태도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묻고 싶다.
폭싹 속았수다의 학씨 대사를 빌려,
“너 뭐 돼?”
이 질문은 욕이 아니다.
근거 없이 선을 긋고,
설명 없이 결론을 들이미는 태도에 대한 질문이다.
행정은 힘이 아니라 설득이어야 한다.
설명 없는 결정은 통치가 아니다.
이 글은 감정의 분출이 아니다.
충분한 질문이자, 분명한 질타다.
이를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건 오해가 아니라 자격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