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한 번 봤다.
정 붙이고, 이야기 만들고,
떠나는 날 울고,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접혔다.
판다는 떠났고
사람들만 남았다.
그때 알았다.
이건 동물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에게 반복시키는 감정의 순환이라는 걸.
판다는 처음부터 우리 것이 아니었다.
돌아갈 운명이 정해진 채로
정만 허락된 존재였다.
그 구조를 알면서도
우리는 또다시 울 준비를 하게 된다.
이번엔 광주라고 한다.
사람들이 가지 않는 동물원,
생활 동선에서도 이미 밀려난 공간,
기억이 아니라 표지판으로만 남은 장소에
또 하나의 상징을 얹겠다는 이야기.
필요해서가 아니다.
살리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저 이미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외교에는 장면이 필요하고,
정치에는 사진이 필요하고,
행정에는 ‘시도했다’는 문장이 필요하다.
그 사이에서 판다는
가장 말이 없고, 가장 이동시키기 쉬운 상징이다.
그래서 또다시
정 붙일 사람만 남기고
돌아갈 시간표가 함께 들어온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끝이 있다는 걸.
돌려보낼 날이 온다는 걸.
울음이 예정돼 있다는 걸.
그런데도
왜 또 이 장면을 반복하는가.
이건 설렘이 아니라
기시감이고,
축제가 아니라
이미 한 번 치른 이별의 재연이다.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다는 말에는
냉소가 아니라
경험이 있다.
이미 봤고,
이미 울었고,
이미 끝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묻게 된다.
이제는
그만해도 되지 않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