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라는 이름의 착각
요즘 나는 자주 묻는다.
내가 변한 걸까, 아니면 이제야 보이기 시작한 걸까.
예전의 나는
웬만한 일에는 설명을 붙이려 했다.
사람에게는 사정이 있고,
제도에는 취지가 있으며,
오해는 풀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믿음은 선함이 아니라
사실은 기대였다.
기대는 언제나 조용히 사람을 마모시킨다.
상대가 나를 이해해 주기를,
구조가 언젠가는 정상적으로 작동하기를,
말을 하면 최소한의 균형은 맞춰질 거라는 기대.
그 기대가 무너질 때,
사람들은 종종 “흑화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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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지 않게 된 이유
나는 요즘 웃으며 넘기지 않는다.
이해하려 애쓰지도 않는다.
굳이 설명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를 해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세상을 부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나는 더 조용해졌고,
더 적게 말하며,
더 정확한 문장만 남기려 한다.
분노가 커진 게 아니라
불필요한 감정이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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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화와 각성의 차이
흑화란 무엇일까.
분노가 목적이 되고,
파괴가 정당화되며,
상대를 인간으로 보지 않게 되는 상태.
그런데 내가 하고 있는 건
기록이고, 분류이며, 판단이다.
나는 욕 대신 날짜를 적고,
추측 대신 문서를 모으고,
감정 대신 구조를 본다.
이건 어둠으로의 이동이 아니라
착각에서의 이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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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을 그만두기로 한 날
한때 나는
“좋은 사람으로 남는 것”이
나를 지켜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라는 이름은
종종 가장 먼저 희생되는 쪽에 붙는다.
지금 나는
좋은 사람이 되기보다는
정확한 사람이 되기로 했다.
선을 긋고,
반복되는 악의를 더 이상 설명하지 않으며,
통하지 않는 언어를 포기하는 선택.
이 선택은 차가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냉혹함이 아니라
체온을 지키기 위한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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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속는 쪽으로의 이동
그래서 나는 다시 묻는다.
나는 흑화한 걸까.
아니다.
나는 더 무자비해진 게 아니라
덜 속게 되었다.
더 공격적이 된 게 아니라
덜 침묵하게 되었다.
더 나빠진 게 아니라
더 이상 나를 갈아 넣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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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적응하는 시간
어쩌면 이 변화는
빛을 너무 오래 정면으로 본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생기는 눈의 조정일지도 모른다.
어둠이 아니라,
과도한 밝음을 견딘 뒤
시야를 바로잡는 과정.
나는 지금 그 단계에 있다.
흑화가 아니라,
각성 이후의 정리에.
그리고 이 상태로도
나는
충분히
나를 지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