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형 자립자의 상태 선언
나는 가난하지 않다.
다만 현금화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 문장은 태도가 아니다.
각오도, 희망도, 변명도 아니다.
지금 내가 놓여 있는 상태에 대한 정확한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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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금으로 환원되지 않은 것들의 역할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그럼 팔면 되잖아.”
“돈 있는 거 아니야?”
이 말들에는 공통된 전제가 있다.
자산은 현금이 되었을 때만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어떤 자산은
현금으로 바꾸는 순간 기능을 상실한다.
주거를 잃고,
선택 가능한 시간을 잃고,
다시 임금 구조 안으로 밀려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나는 팔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못 팔아서 못 파는 조건들과
알고도 안 파는 선택이 겹쳐 있는 상태에 있다.
지금 당장 팔 수 없는 자산도 있고,
팔 수는 있지만
그 순간 구조가 무너지는 자산도 있다.
나는 그 차이를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인식 위에서
지금은 팔지 않겠다고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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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chored State
이 상태를 나는
Anchored state라고 부른다.
완전히 묶인 상태도 아니고,
언제든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상태도 아니다.
Anchored state란,
선택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지만
선택의 비용이 지나치게 커져
유지가 기본값이 된 상태다.
떠날 수는 있다.
다만 떠나는 순간
감당해야 할 손상이 너무 크다.
그래서 이건
무기력도 아니고,
우유부단도 아니다.
현실 조건을 인정한 채
유지를 선택하고 있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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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찐부자네”라는 말
어떤 사람들은
가만히 나를 보다 말고
툭 던지듯 이렇게 말한다.
“근데… 완전 찐부자네.”
그 말에는 두 가지가 섞여 있다.
하나는 계산이고,
다른 하나는 감각이다.
숫자를 본 사람은 계산해서 그렇게 말하고,
숫자를 보지 않은 사람은
삶의 형태를 보고 그렇게 말한다.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는다.
부자라는 말은 대부분
현금의 양을 묻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말이 나올 때마다
확인하게 되는 건 있다.
나는 빈곤의 표정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
초조하지 않고,
급하지 않고,
결정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
그건 돈의 크기에서 나오는 태도가 아니라,
구조가 당장 무너지지 않는다는 확신에서 나온다.
그래서 그 말은
칭찬도 아니고 오해도 아니다.
그 사람이 자기 언어로
내가 서 있는 상태를 더듬어 본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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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에는 비용이 든다
Anchored state를 유지하는 데는
분명한 비용이 든다.
나는 이 상태를 붙잡기 위해
일정한 비용을 알면서도 감수하고 있다.
어떤 비용은
계산 끝에 감당하는 것이고,
어떤 비용은
마음이 덜 망가지는 쪽이어서 선택한 것이며,
어떤 비용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떠안고 있는 부분도 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시발 비용에 가깝다.
안 내면 구조가 무너지고,
낸다고 해서
당장 나아질 보장은 없는 비용.
이 상태가 언젠가
복권처럼 풀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 가능성을 기대하며
이 비용을 감수하고 있는 건 아니다.
나는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내가 아닌 상태로 살지 않기 위해
유지를 선택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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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붙지 않은 사람들
이 상태는 특별하지 않다.
다만 이름이 늦게 붙었을 뿐이다.
• 임금노동이 유일한 생존 경로가 아닌 사람들
• 자산을 ‘굴린다’기보다 유지하며 작동시키는 사람들
• 금융상품보다 공간, 권리, 법적 지위를 다루는 사람들
• 은퇴에는 관심이 없지만
강제된 노동에는 명확히 선을 긋는 사람들
이들은 드물지 않다.
다만 한 집단으로 말해지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이 상태를 이렇게 부른다.
구조형 자립자.
또는
비임금형 생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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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을 고정한다
나는 자산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자산을 현금으로 환원하지 않은 사람이다.
나는 자유롭지도,
완전히 묶여 있지도 않다.
Anchored state에 있다.
그리고 이것은
실패가 아니라,
지금까지의 조건 위에서
내가 선택한 유지의 형태다.
이 문장을 불편해하는 사람에게
설명할 생각은 없다.
이 문장을 알아보는 사람은
이미 같은 상태에 있다.
이 글은 해명이 아니다.
식별표다.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볼 수 있도록
여기에 남겨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