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인 직장인이라면 으레 ‘나인투식스’, 그러니까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일하는 것이 당연지사다. 물론 한국에서는 이조차 사치인 경우가 다반사지만, 사람들의 인식에 ‘점심시간을 제외한 9시부터 6시’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일하는 시간”일 것이다.
공연을 만드는 나에게는 ‘나인투식스’는 사치다. 이유는 단순하다. 주 고객인 예술가의 ‘일하는 시간’은 비예술가와는 개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삶이 창작이고, 예술인 이에게 ‘업무시간’이라는 개념은 무의미하다. 공연 기획자는 예술가에게 맞춰야만 하는 입장이고 말이다.
일을 처음 시작하고는 나도 그렇게 맞추고 살았다. 문제는 그렇게 하면 내 몸이 축난다는 것이다. 나는 한 명의 예술가와만 일하는 것도 아니니, 시도 때도 없이 연락이 왔었다. 내일 주문한 도시락 메뉴를 바꿔 달라는 연락을 밤 11시 30분에 받아본 적도 있다.
어떤 안무가에게서 공연을 함께 만들어보자는 연락을 받았었다. 안 그래도 나는 그의 작품이 좋았었고, 한 번쯤 같이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일단 미팅을 해보자고 했다. 전반적으로 이상한 분위기의 미팅이긴 했지만(미팅이라기보단 면접에 가까웠다), 최악은 마지막 질문이었다.
“저랑 일하면 주말에도 연락할 일이 많을 건데, 괜찮으세요?”
으음...한 3초 고민했나? 내 대답은 괜찮지 않다였다.
그 3초 동안 나는 이 사람의 작품이 내 주말을 할애할 만큼 훌륭한 작품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내 결론은 ‘에이, 그 정도까진 아니지’였고, 이로써 난 분명한 결론을 얻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들에게 나는 그냥 머슴이구나’
그즈음 대학원 동기이자 업계 선배인 분이 이런 이야길 했다.
“오후 6시 지나서 오는 연락은 부고 말고는 응답할 필요 없어. 어차피 우리가 해결 못 해주는 일이야.”
맞는 말이다. 공연 기획자가 상대하는 사람은 예술가만이 아니다.
각종 기금, 소위 말해 나랏돈으로 굴러가는 공연이 많은 한국 기초예술 분야에서 공연 기획자는 재단 담당자와 이야기 나눌 일이 많을 수밖에 없다. 예산편성부터 각종 홍보물 시안, 정산자료까지 공연 제작의 과정 대부분은 이들과의 협의를 거쳐야만 한다.
이 외에도, 언론사, 공연장, 온라인 예매처, 디자이너, 심지어는 도시락집 사장님까지, 예술가만 제외하면 공연 기획자가 업무적으로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들은 모두 업무시간이 정해져 있다.
그리고 예술가가 기획자에게 연락해서 하는 요구나 요청, 혹은 문의 대부분은 저들 중 누군가의 확인이나 협의가 필요한 사안이다. 그러니 남들 일 안 하는 때에 연락해 봤자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라곤, “날 밝으면 확인해 보겠습니다.” 밖에 없고, 그냥 나만 힘든 것이다.
여전히 나는 주말에 일할 때도, 밤에 일할 때도 있다. 특히 국제교류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면, 당연히 시차를 맞춰야 하는 부분도 있고, 공연이란 게 주말에 올라오는 경우가 많으니, 주말 근무 역시 이상한 일이 아니다.
기획자로서 아티스트 연습을 가봐야 하는 때도 있는데, 합주가 밤에 진행된다면 이 역시 어쩔 수 없다.(공연이 밤에 진행되는 거야 너무 당연한 이야기니까 논외로 하자)
그렇지만, 최소한 위에서 언급했던 불필요한 문의나 연락은 내가 바로 답을 할 수 있는 내용이라 하더라도 답변을 미룬다. 이럴 때는 메신저나 이메일에 있는 예약 기능이 매우 유용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라도 상대와 말할 기회가 생기면 꼭 이야기한다.
9시부터 6시가 지나면 나를 찾지 말라고.
어차피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