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1 클뤼니 수도원
프랑스는 이탈리아와 함께 가톨릭 신앙의 중추를 담당해 온 국가이다. 수도 생활이 위기에 처했을 때 새로운 개혁 수도회가 프랑스 땅에서 태동했다. 클뤼니 수도원과 카르투시오회, 시토회는 10세기 이후의 수도원 역사에 뚜렷한 이정표를 남겼다.
클뤼니 수도원은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도 등장한다. 저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이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앞에 무릎을 꿇은 사건이다.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이 바로 클뤼니 수도원 출신이었다. 다만 본격적인 수도 생활을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이 사건을 다루는 역사물에는 12세기의 유명한 삽화가 자주 등장한다. 삽화에서 바닥에 쪼그려 앉은 사람이 황제이고, 그 뒤로 고깔모자 수도복을 입은 사람은 클뤼니의 위그(Hugues de Cluny, *1) 수도원장이다. 위그 원장은 황제의 세례 대부이기도 했다. 오른쪽 여성은 카노사성의 성주 마틸데(Matilde di Canossa) 후작이다. 궁지에 몰린 황제가 두 사람을 찾아가 중재를 요청하는 모습이다.
카노사의 굴욕은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운동과 관련이 깊다. 당시에는 세속 군주나 영주들이 주교나 수도원장을 임명하는 일이 흔하던 때였다. 그들이 성당과 수도원을 짓고 토지를 하사했으므로, 당연한 권리로 생각했다. 이런 관행에 반기를 든 곳이 클뤼니 수도원이다.
클뤼니 수도원 자체는 아키텐 공국의 기욤 1세(Guillaume I)가 910년에 지었다. 그는 베네딕토회의 수도승 베르노(S. Bernon)를 첫 수도원장으로 초빙했다. 그리고 수도원의 완전한 자치와 독립을 문서로 보장했다. 이를 계기로 베르노와 그의 후임자들은 제도적인 개혁에 나섰다.
개혁의 핵심은 외부 간섭 배제였다. 수도원장을 수도원 안에서 자율적으로 선출했다. 수도원을 교황 직속으로 두어 지역 주교의 영향에서도 벗어났다. 봉건제의 뿌리인 봉토 소유를 전면 금지해 세속 영주가 관여할 틈을 주지 않았다. 오직 교회와 교황에게만 순종한다는 것이 그들의 이상이었다.
클뤼니 개혁은 교황의 후원 아래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며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클뤼니와 연대하며 영주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수도원이 갈수록 늘어났다. 그들은 베네딕토 규칙을 준수했지만, 점차 대수도원의 지휘를 받는 중앙집권적인 조직을 형성했다. 클뤼니 소속 수도원은 13세기 말에 거의 1,000개에 이르렀다고 한다. (*2) 놀라운 숫자이다.
클뤼니 개혁을 적극 지지하고 이를 교황권 확립의 계기로 활용한 교황이 그레고리우스 7세이다. 그는 교황이 세속 권력보다 우위에 있다고 천명하고, 황제나 제후 같은 평신도의 성직 서임권을 강력히 금지했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교황과 황제의 갈등이 카노사의 굴욕을 낳았다. 교황은 파문을 무기로 일시적 승리를 거뒀지만, 곧 하인리히 4세의 반격을 받는다. 황제는 로마를 점령하고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을 폐위시켰다.
클뤼니 개혁이 제도적인 수준에만 머무르지는 않았다. 기도와 노동, 전례 등 수도 생활에서도 클뤼니 고유의 관습과 문화를 형성했다. 특히 전례 기도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노동은 최소로 줄였다. 매일 138편의 시편을 낭송했고, 하루에 두 번 미사를 드리는 경우도 잦았다. 전례 음악에도 상당한 공을 들였다. (*3) 이 정도면 사실 노동이나 성독(聖讀)은 거의 뒷전으로 밀어둔 게 아닐까 싶다. 특히 죽은 이를 위한 위령 기도를 중요하게 여겼다. 오늘날 전례력에 남아 있는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11월 2일)은 이 수도원에서 시작되었다.
클뤼니 수도원은 빠르게 성장하면서 잇달아 건물을 새로 짓거나 확장했다. 특히 1130년에 완공된 제3 클뤼니(Cluny III)는 당대 최고의 웅장한 건축물이었다. 자료에 따르면 길이 184m에 아치의 천장 높이는 31m나 되었다. 대략 축구장 2개를 길게 붙인 크기였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외관에 아름다운 조각과 회화, 공예 작품으로 거룩하면서도 호화로운 공간을 꾸몄다. 16세기에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전이 건축되기 전까지는 유럽 최대의 성당이라는 자리를 지켰다.
제3 클뤼니의 완성은 클뤼니 전성기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쇠퇴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토록 번성했던 클뤼니 수도원은 지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많던 클뤼니 계열의 수도원도 하나도 남지 않았다. 그런데도 굳이 클뤼니 수도원을 찾아간다. 수도 영성의 역사에서 새겨볼 만한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박물관으로 남은 그 유적이라도 보고 싶었다. 얼마나 크고 얼마나 화려했을까. 그 개혁의 정신은 어디로 사라지고 자금은 폐허로만 남았을까. 황성 옛터를 돌아보는 심정으로 클뤼니 마을에 들어섰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이사야 40,6-7)
클뤼니 마을은 프랑스 제2의 도시 리옹에서 북쪽으로 100km쯤 떨어져 있다. 수도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이지만, 수도원은 사라지고 마을만 남았다. 현재 인구 5,000명쯤이라고 한다. 수도원과 마을을 분리했던 담장의 일부가 요새처럼 버티고 있다. 담장의 길이는 1,350m, 그 안의 면적은 15ha(45,000평)였다고 한다.
클뤼니 수도원은 종교전쟁의 파고가 몰아쳤던 16세기에 위그노(Huguenot)의 공격으로 1차로 파괴되었다. 이어서 18세기 프랑스혁명으로 종말을 맞았다. 1791년 10월 25일 12명의 수도승이 참석한 가운데 마지막 미사를 봉헌했다. 수도승들은 추방되었고, 건물은 약탈과 파괴로 무너져갔다. 혁명 정부는 이 건물을 상인들에게 매각했고, 이를 사들인 자재상들은 값비싼 석재를 채취하는 채석장으로 삼았다.
지금은 국립기념물센터가 관리하는 박물관이다. 입구에서 파괴 전의 모습을 본뜬 모형을 볼 수 있다. 현재의 건물은 다른 색깔로 표시했는데, 전체의 10%나 될까 싶었다. 수도원 성당의 일부였던 4개의 첨탑 가운데 하나가 간신히 살아남았다. 구매한 책자에서 도면을 들여다보며 한참 궁리하고서야 대략적인 배치와 방향을 가늠할 수 있었다.
클뤼니의 유적에서 화려했던 옛 영화를 상상해 내기는 어렵다. 입구와 연결된 작은 회랑에서 살아남은 조각과 공예 작품 몇 점을 볼 수 있다. 이어서 거대한 회랑과 정원, 유적지로 연결된다. 파괴된 자리에 남은 주춧돌의 크기가 웅장했던 건축물의 위용을 말해준다. 한 무리의 청소년들이 웃고 장난치며 정원을 가로지른다. 남은 건물의 일부를 공학 계열 학교로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클뤼니의 쇠퇴를 프랑스혁명 탓으로만 돌리는 시각은 그리 온당하다 할 수 없다. 수도 영성의 약화라는 내부적 요인을 먼저 보아야 한다. 클뤼니 개혁의 성공으로 번성을 누리던 11세기에 이미 수도 생활은 위기의 징후를 드러냈다. 교황 직속인 클뤼니 수도원에는 부와 특권이 쌓여갔다. 수도원 건물은 화려하고 웅장하게 지어졌다. 외형에 치중하면 정신은 쇠퇴하는 법이다. 수도승들은 노동보다 전례에 더 치중했다. 아름다운 전례는 거룩해 보이기도 하지만, 자칫하면 형식에 치우쳐 본질을 잃는 길이 된다.
가장 큰 성공이 곧 실패의 싹을 틔운다. 성공한 개혁은 그 성공에 안주하는 순간 곧바로 쇄신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클뤼니는 점차 구체제(Ancien Régime)로 여겨질 만큼 제도화된 조직이 되었다. 개혁을 부르짖은 클뤼니가 이제 개혁의 대상이 된 것이다. 어느 학자(J. Leclercq, OSB)는 이를 ‘번영의 위기’라고 진단했다. 성공이 가져온 실패, 자기 성공의 희생자라 할 만하다.
‘번영의 위기’는 교회사에서 드물지 않게 나타난다. 교회의 위기는 결코 가난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교회가 풍요 속에서 안락을 누릴 때 교회는 서서히 쇠퇴해 결국 위기를 맞았다. 2014년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중산층의 교회, 웰빙교회가 되지 않도록 하라”라고 당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와 종교 단체들이 확장과 성장을 발전으로 여긴다. 외형적 성장과 물질적 풍요를 하느님의 은총으로 여긴다. 그러나 거룩한 신성은 그런 성장과 풍요 속에 깃들지 않음을 교회사는 보여준다.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 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습니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갑니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립니다. (시편 90,5-6)
클뤼니 수도원은 수도원 운동이 어떤 경우에 실패하는지를 보여주는 반면교사이다. 수도원은 부족함이 아니라 넉넉함으로 인해 실패한다. 결핍이 아니라 소유의 과잉이 수도 생활의 쇠퇴를 불러온다. 너무 엄격해서가 아니라 그 엄격의 완화가 수도 영성의 약화를 낳는다. 학문과 지식이 뛰어난 구성원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직한 성덕이 메말랐을 때 그 공동체는 활기를 잃고 시들어간다.
위기는 다시 기회를 낳는 법이다. 클뤼니가 전성기를 구가할 때 바로 클뤼니의 코 앞에서 반란이 시작되었다. 11세기 말에 클뤼니 남쪽 200km쯤에서는 카르투시오회가, 북쪽 100km쯤에서는 시토회가 출현했다. 그들은 클뤼니의 화려함과 안락함을 거부하고, 가장 엄격한 수도 생활을 실천했다. 기도와 노동을 복원하고, 고독과 침묵 속에 하느님을 만나는 봉쇄 생활을 택했다. 클뤼니의 검은 수도복을 뿌리치고 흰 수도복을 입었다.
(*1) 클뤼니의 위그(Hugues de Cluny)는 이탈리아어로 Ugo, 영어로는 Hugh이다.
(*2) 누리집 자료 (https://www.cluny-abbaye.fr/)
(*3) 『수도생활 역사 II』 (헤수스 알바레스 고메스, 강운자 수녀 편역, 2001, 성바오로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