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영성 고전] 6
관상(觀想)은 수도 영성으로 추구하는 최고의 경지다. 고요한 바라봄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현존을 깊이 체험하는 것이다. 신비적 합일에서 오는 감미로운 침묵이며 은은한 기쁨이다. 금욕과 수덕을 동반한 깊은 수행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불교 용어인 선정(禪定)과도 맥이 닿지 않을까 한다. 세속에 사는 우리가 관상을 맛보기는 쉽지 않다. 평생 기도로 살아가는 수도자들도 늘 관상에 들어서지는 못한다. 애초에 관상이 인위적인 노력으로 다가설 수 있는 영역인지에 회의적인 견해도 있다. 오직 은총으로만 가능한 경지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2천 년 역사 속에 탁월한 관상의 스승들이 많다. 카르투시오회의 수도승 귀고 2세(Guigo II)는 관상에 관한 훌륭한 가르침으로 그리스도교 영성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가 쓴 「관상 생활에 관한 편지」는 그저 몇십 쪽에 불과한 소품이다. 이 작은 편지 형식의 글이 오늘날 열풍으로 번지고 있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聖讀)의 교과서로 자리 잡았다. 이토록 쉽고 간결한 안내서가 없기 때문이다. 일반 대중에게까지 널리 알려졌다고는 할 수 없지만, 영성 분야에서는 불멸의 고전이라 해도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을 것이다.
카르투시오회는 수도승 개인의 이름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자신을 감추고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는 것이 이 수도회의 영성이다. 이 때문에 귀고 2세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매우 적다. 아마도 수도회의 초기 회원 중의 한 사람인 듯하다. 이 수도회의 제9대 원장을 지냈고, 1188년에 선종했다는 정도가 그나마 확실한 정보이다.
귀고 2세의 편지는 흔히 ‘수도승의 사다리’라는 다른 제목으로도 불린다. 관상에 이르는 길을 네 단계의 사다리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바쁘게 손노동을 하다가, 나는 영적인 일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갑자기 영적 수행의 네 단계가 떠올랐습니다. 독서, 묵상, 기도, 관상입니다. 이것들은 수도자들이 지상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됩니다. (귀고 2세, 「수도승의 사다리」, 허성준 옮김)
귀고 2세에 따르면, 독서(lectio)는 마음을 다하여 말씀을 읽는 것이다. 묵상(meditatio)은 그 말씀을 반복해서 마음에 새기고 음미하는 과정이다. 기도(oratio)는 영혼의 갈망을 간절히 청하는 것이며, 관상(contemplatio)은 영혼이 하느님과의 일치 속에 그 안에 머무는 단계라고 했다.
독서는 온 힘을 집중하여 성경을 주의 깊게 연구하는 것입니다. 묵상은 이성의 도움으로 숨겨진 진리를 알려는 정신의 능동적인 작용입니다. 기도는 선을 얻게 하고 악을 멀리하시는 하느님께 바치는 마음의 봉헌입니다. 관상은 정신이 하느님께로 들어 올려져 거기서 머무르는 단계로, 이때 한없이 감미로운 환희를 맛봅니다. (귀고 2세, 허성준 옮김)
흔히 우리는 관상을 고요히 눈을 감고 깊은 명상에 빠진 상태로 잘못 이해한다. 관상의 시작이 독서라는 가르침은 놀랍다. 독서는 물론 성경 말씀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 말씀을 되새김질하듯 마음에 새기는 묵상이 필요하다. 이어서 간절히 청하는 기도를 통해 비로소 관상에 이를 수 있다. 귀고 2세는 이를 음식을 먹는 과정으로 다시 한번 설명한다.
독서는 복된 삶의 감미로움을 추구합니다. 묵상은 그것을 깨닫고, 기도는 그것을 청하며, 관상은 그것을 맛보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독서는 음식을 입에 넣는 것이고, 묵상은 그것을 씹어 분해하며, 기도는 그것의 맛을 느끼고, 관상은 그것으로 인해 기쁘고 새롭게 되는 감미로움 그 자체입니다. (귀고 2세, 허성준 옮김)
이제 우리는 적어도 관상에 이르는 길만큼은 분명히 알게 되었다. 무작정 눈을 감고 관상에 빠져보려는 어리석은 시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이 네 단계는 각각 분리된 작용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음식을 네 단계로 나누어 먹지는 않는다. 독서 묵상 기도 관상은 하나로 연결되어 서로에게 작용하고 영향을 미친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독서 없는 묵상은 오류에 빠지기 쉽고, 묵상 없는 독서는 메말라서 가슴에 스며들지 못한다. 묵상 없는 기도는 냉담하고, 기도 없는 묵상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독서와 묵상과 기도 없이 관상에 이르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차라리 기적에 가깝다고 했다.
독서와 묵상으로 단련된 영혼은 이제 천상의 감미로움을 향한 갈증에 휩싸인다. 드높이 날아오를 준비를 끝낸 영혼의 간절한 갈망, 그것이 기도이다. 제 힘으로는 날아오를 수 없음을 깨닫고 온 마음으로 염원한다. 인간의 영역은 여기까지이다. 그 이후로는 그분께서 이끌어 주신다.
“주님은 갈망하는 영혼이 모든 것을 말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기도 중에 개입하시며, 그 영혼을 만나기 위해 서둘러 다가오십니다.” (귀고 2세, 허성준 옮김)
귀고 2세의 서한(「수도승의 사다리」)은 분량이 적어서 단행본으로 발간된 책은 찾기 어렵다. 기도와 성독을 다루는 책에서 부록으로 소개한 경우가 있다. 다음 두 권의 책에서 한글 번역을 볼 수 있다.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1: 독서와 묵상』 (허성준, 2014, 분도출판사)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엔조 비앙키, 이연학 옮김, 2001, 분도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