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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HY Mar 19. 2024

봄날 어느 하루

#19

직장이라는 조직에 아직 적응하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는 ‘연차’이다. 그 숫자를 보면, 1년 중에 내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날이 며칠로 정해져 있다는 게 커다란 속박으로 느껴지는 거 같다.

난 4월에 연차가 갱신된다. 그 뜻은 3월까지는 그 전해의 연차를 모두 소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게 16일의 연차가 있는데, 계속되는 야근과 일정 등으로 3월 중순까지 쓰지 못한 휴가가 6일 5시간 남아있었다. 수요일에 급히 금요일 오후 5시간의 휴가를 신청하고, 남은 2주간 휴가를 분배해 신청하기로 했다.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걱정되어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목요일 밤, 자기 전 침대에 누워 내일 낮에 무엇을 할까 행복회로를 돌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의 휴가신청이기도 하고, 그 시간을 어떻게 하면 더 아깝지 않게 보낼까 생각하다 보니 선택하기 쉽지 않았다. '근처 사는 친구에게 연락해 맛있는 걸 먹을까, 보고 싶던 듄 2 영화를 볼까, 선물 받은 쿠폰으로 카페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까, 집에 가서 누워 보낼까, 책을 읽을까, 미뤄둔 글을 써볼까.' 오랜만의 자유시간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는 사이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회사 일들은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거리껴지지 않았다. 영화시간과 극장을 잠시 찾아보며, 다음날을 두근두근 기다렸다.     


출근하자마자 처리해야 할 일들이 밀려왔다. 갑작스럽게 퇴사자들이 생기며 업무가 늘었고, 그로 인한 조직 개편으로 난 다른 팀으로 가게 되었다. 기존 업무에 새로운 업무까지 추가적으로 맡았는데, 업무를 제대로 확인할 겨를도 없이 기존에 쌓인 업무와 급히 내려온 일들을 처리하느라 시간이 초단위로 흘러가는 거 같았다. 아마 오후 휴가로 마음이 급해져 더 그런 것이리라.

잠깐의 회의를 마친 후, 11시 조금 넘어 외근을 나가게 되었다. 별생각 없이 급히 건물을 나서는데, 순식간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바람은 따뜻했고, 온 세상에 봄볕이 가득했다. 내가 입은 검은색 경량패딩과는 어울리지 않는 세상이었다. 수많은 시계가 한 번에 돌아가는 듯한 좁은 콘크리트 공간이, 이제 저너머의 세상이 되었다.

차를 타고 가면서도 온 세상을 비추는 노란 봄빛을 볼 수 있었다. 약속장소에 조금 일찍 도착해 상대방을 기다리며 아파트단지 주변을 둘러보는데, 아무것도 없던 겨울 가지에 하얗게 무언가 얹어 있는 것이 보였다. 매화꽃이었다.

나의 첫봄이었다.

콘크리트를 나오자, 어느덧 몽글몽글 매화가 피어나기 시작했고, 바로 옆에는 작고 노란 산수유꽃이 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외근을 마치자 그때부터 휴가시간이 시작되었다. 봄이 왔음을 물씬 느끼며, 퇴근한 상태라는 것이 나를 더없이 들뜨게 했다. 이상하게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는데, 날아갈듯한 느낌이었다. 동네 보쌈맛집에서 예전팀분들과 점심을 먹고, 차 한잔을 테이크아웃하고 회사로 복귀했다. 급히 처리해야 할 업무와 쌓인 일을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출발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간 만들지 못했던 회사 근처 도서관의 회원증도 만들기로 했다. 몸은 콘크리트 안에 있었지만, 마음은 봄볕이 가득했다.


도서관 회원증 발급을 위해 재직증명서를 발급받고, 외부기관에 전화하고, 급히 제출해야 할 서류를 작성하고 , 물품 결제와 결재를 했다. 예상보다 시간이 빨리 지나 이미 3시가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지금 하지 않으면 다음 주는 더 막막해지는 상황이었다. 나는 쌓여있던 업무기록을 차근차근 입력하기 시작했다. 일은 하고 있었지만 휴가 시간이고 퇴근한 상태라는 것이 나를 들뜨게 만들었다. 자의적으로 일한다는 기분이 느껴져 그런 게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그게 회사업무란 것에 현타가 오긴 했지만 말이다.

기억을 더듬고 기록을 찾아보며 시스템에 업무를 입력했다. 다다다닥, 따각 따각. 자판과 마우스가 바빠졌다. 30분, 1시간이 쉬이 흘렀지만 아직 정리할 게 많이 남았고, 조금만 더 하자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다시 30분만 더 1시간만 더 하다 어느덧 5시 40분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창에서 느껴지는 해의 기운이 달라져 있었다. 아직 정리해야 할 것들은 남아있었고, 30분은 더 해야 마무리될 양이었다.

친구와의 만남, 천천한 도서관 구경, 카페에서의 글쓰기, 영화관람. 살랑거리고 봄볕 가득한 것들이 아지랑이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무겁게 심장이 쪼여오기 시작했고, 더 이상 앉아있을 수 없었다. 난 가방을 챙겨 6시를 10분 남기고 나왔다.


날이 조금씩 어두워지려 하고 있었고 따뜻한 볕은 사라져 흐려져있었다.

 ‘아아 나의 휴가 시간들... 따뜻한 날이었고, 그저 산책만 해도 기분 좋을 날이었는데...'

이대로 그냥 집에 갈 수 없었다. 나를 위해 뭔가 해줘야 했다. 난 도서관으로 향했고, 6시 직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몇 시간 전 발급받은 재직증명서로 회원증을 신청했고, 오랜만에 캠코더로 회원증용 사진도 찍었다. 두둥. 몇 분 후 도서관 카드가 발급되었다. 기다리던 선물을 받은 거 같았고, 왠지 모를 설렘으로 회원증을 만지작거리다 지갑에 고이 꽂아놓았다.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회원증을 발급받은 날 그냥 갈 수 없어 열람실을 둘러보기로 했다. 꽤 큰 열람실이었는데, 날 좋은 봄날 금요일이라 그런지 사람은 많지 않았다. 난 좋아하는 마스다미리 작가의 칸이 있는 800번대로 향했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못 보던 작품이 눈이 띄었다. 집 근처 도서관에는 없던 책들이었다. 두근. 만화시리즈도 있었고 에세이도 있었다. 난 바로 에세이를 집어 들고 아무 곳이나 펼쳐 한 장을 읽어 내려갔다.

역시 마스다미리님의 글다웠다. 듬성듬성, 숨 쉴 수 있게 얼기설기 엮어진 일상의 글들 사이로 숨이 쉬어졌다. 오늘 나는 온전히 ‘일상’을 살지 못했지만, 그 글을 읽자 내가 그 일상을 사는 거 같았고 숨이 쉬어졌다. 그리고 일상을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고,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다시 ‘그래 나 이렇게 살고 싶었지. 이렇게 글을 쓰고 싶았지. 이렇게 나누고 싶었지.’란 생각이 들었다. 그 한 페이지를 읽는데, 허무하게 사라진 나의 일상과 비어버린 내 안의 무언가가 조금 채워지는 거 같았다. 그래, 오늘 나는 이렇게 일상을 보냈어야 했다.


도서관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반가운 사람이라도 만날 것처럼 열람실 이곳저곳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여러 책을 올려놓고 읽는 사람, 책을 펼치고 노트에 메모하는 사람, 이어폰을 꽂고 태블릿을 보는 사람, 눕듯이 기대앉아 멍하니 책을 바라보는 사람, 반짝이며 집중하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이 있었다.

‘이들의 오늘 일상은 어떠했을까. 하루가 원하는 대로 가득 채워졌을까. 무엇을 채웠을까.’ 나처럼 회사가 아닌 이곳에서 하루를 보낸 이들의 시간이 궁금해졌다. 허무히 하루를 보냈단 사람도, 어디로 향해가는지 고민하고 방황하는 사람도, 원하는 무언가를 채워 만족스러운 사람도 있을 거였다. 여기 있는 이들도 그저 자기만의 하루를 보내고 있는 거겠지 싶었다. 그리고 내가 오늘 도서관에 있었다고 하루가 채워진 느낌을 받지는 않았았을지 모르나, 아까 느꼈던 그 봄볕에 있었다면 그리고 나를 위한 무엇인가를 했다면 채워졌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라 느껴졌다.     


처음 만난 봄, 아쉽게 흘러간 시간, 하지만 다시 붙잡은 끝자락.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이제 내게 주어진 나의 시간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지 않고 그게 무엇이든 어떻게 되든 내가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고 싶은’ 나의 시간을 ‘해야 할 일들’의 시간으로 대체하지 말아야겠다. 내 봄을 난 그렇게 보내기로 했다. 오늘 난 그렇게 두 번째 봄을 맞을 준비를 마쳤다.

이제 난 나의 두 번째 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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