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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HY Mar 12. 2024

맞지 않는 반찬 뚜껑

#18

새로운 직장에서 일 년 남짓 지났을 무렵, 불현듯 집에 있던 반찬통이 떠올랐다.     

통에 얼추 맞을 거 같은 파란 뚜껑을 집어 이리저리 닫으려 했지만 미세한 차이로 아귀가 맞지 않았던 반찬통이었다. 난 한쪽면의 홈을 먼저 맞추고, 그 옆의 홈을 차례차례 맞춰가며 눌러보았는데, 결국 남은 면들의 뚜껑은 들려졌다. 힘을 주어 한번에 닫으면 고정될까 해서 네 면을 맞춘 후 세게 눌러보았지만, 뚜껑은 ‘따닥’하고 잠시 맞는 듯하다가 이내 ‘투둑’하고 통에서 튕겨지듯 나왔다. 맞지 않는 뚜껑이었는데 하다 보면 맞지 않을까 싶어 한참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보며 닫으려 했던 거 같다.     


그 모습이 나의 상황을 한 번에 보여주는 거 같이 느껴졌다.     

초기부터 다니고 있는 직장과 업무가 맞지 않는다 느꼈지만, 어떻게 보면 또 맞는 부분이 있는 거 같아 혹시 맞는 게 아닐까 하며, 뚜껑을 돌려 맞추듯 하루하루 보냈다. ’그래도 내가 해왔던 분야이니, 그래도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일이니, 그래도 월급이 나오니, 그래도 아는 사람도 있으니, 별다른 대안이 없으니’ 하며 말이다.

그렇게 뚜껑을 닫느라 애쓰느라 정작 신경 써야 할 내용물은 잘 보지 못했고, 통 안의 내용물이 수분을 잃고 조금씩 말라가 듯 내 안의 무언가도 조금씩 말라가는 거 같았다. 나의 감정, 감각, 아이디어, 영혼 같은 것들이 말이다.     

 

또 몇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은 뚜껑을 맞추려고 애쓰지도 않고 그저 통 위에 얹어놔 버리게 된 거 같다. 하루하루를 보내느라 지쳐 일이 맞는지조차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던 거 같기도,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버려 맞추려고 애쓰지 않게 된 거 같기도 했다.

오랫동안 맞지 않는 통에 있는 바람에, 수분을 머금고 있어야 할 내용물이 말라비틀어져 버린 거 같아 슬프고 두렵기도 했다. 자연 속에 있을 때 다가오는 감정, 다른 이를 대할 때의 섬세함과 진솔함, 좋아하는 책을 읽고 싶어 하는 마음 같은 것들이 온전히 느껴지지 않는 거 같아서 말이다.


뚜껑을 닫으려고 다시 애써야 하는지, 통을 지금 바로 버리는 게 맞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고 용기도 없어,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요즘이다. 무엇이 옳은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의 시기가 온 거도 같다. 그렇지만 모른다고 고민만 하고 있는 건, 마치 맞지 않는 통을 바라보고만 있는 것과 같을 거다. 그래서 오늘도 난 우선 할 수 있는 거를 해보기로 했다. 단 10줄이라도 써보라는 응원에 힘입어서 말이다. 그러면서 통 안의 것이 모두 말라버린 건 아니라고, 조금씩 해내가며 오늘 스스로에게 힘을 주어 본다.     


40대 중반, 여전히 이리 고민하고 있다는 게 안타깝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하다.

난 여전히 맞는 통을 찾아 ‘철컥’하고 닫히는 쾌감을 느끼고 싶고, 맞는 통을 찾으면 다시 촉촉해질 수 있을 것이라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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