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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HY Mar 20. 2024

응급실 방문

#20

오랜만에 응급실에 다녀오게 되었다. 점심 먹고 3시간 정도 지났는데. 갑자기 명치를 중심으로 몸통에 '쩡'하게 충격이 오더니 결리는 듯한 통증이 시작되었다. 특별한 일이 있던 게 아니었다. 은사님 댁에서 점심과 간식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주유도 할 겸 이전한 동네서점을 구경하고 돌아온 참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휴대폰 불빛으로 도서관에서 빌린 짧은 에세이만화 한 권을 막 다 읽어가고 있었다. 명치와 등에 뭔가 막힌 듯한 통증은 강렬해지기 시작했고, 쉽게 가라앉을 거 같지 않았다. 밥 먹은 지 한참 후라 체한 거는 아닐 것이고, 운동을 안 했으니 근육통도 아닐 테고, 난 그저 차에 불편하게 앉아있어서 잠시 결리는 건가 생각했다.


통증으로 움직이기 어려워지기 전에 얼른 집으로 들어왔다. 외출복을 벗어던지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옷이 주던 압박이 줄어들면 나아지려나 했는데, 통증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심상치 않았다. 위경련인 거 같았다. 재작년 여름에 위경련으로 고생을 했던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명치에 집중적으로 통증이 느껴졌고, 난 소화제를 마시고 고꾸라지듯 침대에 누웠다. 손발은 차가워지고 몸에선 땀이 나기 시작했다. 온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고, 꼼짝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그저 통증이 가라앉기만을 바랐다. 배를 따뜻하게 하면 나아졌던 기억에, 겨우 몸을 일으켜 핫팩을 배 위에 붙이는 정도만 할 수 있었다. 왜 갑자기 이렇게 아픈 거지, 스트레스가 있긴 했는데 신체화되어 나온 건가, 그 스트레스가 이 정도였나 싶었다.


20대 중후반 즘 요로결석이 처음 생긴 때가 있었다. 커터칼로 뼈를 계속 긁어대는 듯한 생전 처음 경험하는 통증이었다. 자세를 바꾸어도 아무런 변화 없이 계속 아팠고, 하늘이 노래지는 게 이런 건가 싶었었다. 이쯤 아프면 기절해도 좋겠다 싶었는데도, 정신은 멀쩡했고 아프기만 했었다. 주말 저녁이라 응급실에 가게 되었고, 아프지만 않게 해 주면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검사결과 요로결석이었고, 없어질 거 같지 않던 통증은 약물투여 후 신기하게 사라졌다. 난 그때 통증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알게 되었다. 아프면 숨 쉬는 것도 힘들고, 치료받는데 부끄러워지는 것도 상관없게 된다. 그저 세상에 바라는 건 통증이 없어지는 게 된다. 그때까지 난 정신적 고통이 육체의 고통보다 힘든 것이라 생각했는데, 육체의 고통도 정신의 것을 집어삼킬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후, '차라리 몸이 아픈 게 낫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었고, 아파서 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게 되었다. 아픈 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잠깐이나마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몇 년간 힘든 시간을 보내자, 아파서 어쩔 수 없이 회사를 그만두겠다 말하는 상상을 했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해서 이렇게 아프게 된 건가란 괜한 생각이 들었다.           


요로결석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해도 통증이 나아지지 않았지만, 위경련은 시간이 지나면 나아졌었기에 조금 더 버텨보기로 했다. 하지만 아프니 시간이 가지 않는 거 같았고, 이십 분이 지났는데도 통증은 여전했다. 내가 더 할 수 있는 건 없었고, 그대로 있기 힘들었다. 결국 엄마의 권유로 응급실에 가기로 했다. 위경련 같은 걸로 응급실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아픈 내가 일요일 오후에 할 수 있는 건 그곳에 가는 것뿐이었다. 겨우 옷을 갈아입고, 택시를 호출했다. 움직이는 게 힘들어 누군가 다 해줬으면 싶었다. 119가 생각났으나 그 정도는 아닌 거 같아 꾸역꾸역 움직이며 병원으로 향했다. 요즘 의사파업으로 병원 분위기가 어수선하고, 응급실에서 사람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어 불안하기도 했다. 그래도 다행히 택시를 타고 가는데 조금씩 통증이 나아지는 거 같았다.

      

응급실에 도착해 수속을 밟고 간호사와 간단한 면담을 진행했다. 증상과 점심에 무엇을 먹었는지 물었고, 미역국, 돼지불고기, 청포묵, 김치, 두부조림을 먹었다고 했다. 나는 말하면서도 건강식으로 참 잘 먹었다 싶었다. 그 와중에 간호사가 병원에서 처음 보는 남자간호사여서, 아는 사람이 떠오르기도 했다.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거 보니 확실히 통증이 덜해진 거 같았다.          


응급실 안에는 환자가 한 명도 없었다. 난 침대에 누웠고, 수액과 처치약을 바로 맞기 시작했다. 조금 있다 의사가 와서 배를 여기저기 눌러보더니 아픈지 물어보았다. 그렇게 세게 누르니 아픈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속으로 생각했는데, 명치 쪽은 괜찮았지만 오른쪽 아랫배가 조금 아팠다. 의사는 조형제 CT를 찍겠다 했다. 위경련이고 아까보다는 나아진 거 같은데 꼭 조형제를 맞아야 하는가 생각이 들었다. 한 7년 전 열과 어지러움증으로 응급실에서 조형제 CT를 찍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의료진이 방사선물질이 있어 조심스러워하며 검사를 받을지 물어봤던 게 생각났다. 걱정은 됐지만 필요하니까 찍으라는 건가 싶어 거부하지 않고 검사를 받게 되었다. 소변검사, 흉부 X-ray검사 후에 CT를 찍었다. 조형제를 맞으면 혈관이 많은 곳에 열감이 올 거란 설명처럼 몸에 후끈한 열감을 느꼈다. 무언가 돌돌 돌아가는 작은 통 안에 누워 지시에 맞춰 숨 참기를 대여섯 번 했고, 10분간의 검사를 마쳤다.     

병원의 힘인지, 검사의 힘인지, 약의 힘인지, 이제 통증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고, 난 다시 편안하게 침대에 누웠다. 여러 사람이 곁에서 돌봐준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어 통증이 사라지나 싶기도 했다.     


휴대폰도 보지 않고, 오랜만에 맑은 정신으로 가만히 누워있었다. 응급실은 고요했고, 무언가 계속하고 있는 의료진들과 주변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나 혼자였던 응급실엔 새로운 환자가 오고 갔다. 중년 아들의 부축을 받고 들어온 80대 중반의 할머니는 배가 아프지 않게 해 달라며 신음하고 누워계셨고, 아버지와 함께 온 검은색 트레이닝 복의 10대 남학생은 어딘가에 부딪혀서 왼손 엄지손가락이 젖혀졌다며 놀란 듯 조용히 앉아있었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 여성은 어지러움증으로 정신이 없어 보였고 휠체어를 타고 이리저리 검사를 받으러 다녔다.


병원에 온 지 2시간 정도 지났고, 검사결과를 들을 수 있었다. 다행히 증상과 관련 특별한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검사결과 몇 가지 염려되는 점이 있었지만 그건 추후 진료가 필요한 부분이었다. 링거를 제거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응급실답게 무려 22만 원을 결제하고 약을 받아 나왔다.


몇 시간 사이 병원 밖은 깜깜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나를 못살게 하던 통증은 사라졌고 약간의 뻐근함만 흔적처럼 남아있었다. 병원에 내내 누워있었는데도 앓았던 탓인지 온몸에 기운이 없었다. 집에 돌아와 편한 옷으로 갈아입자마자 침대로 다이빙했다. 이불은 폭신했고 몸이 그대로 녹아들어 침대와 한 몸이 되는 거 같았다.      


평소와 같은 조용한 하루였는데, 예상치 못한 위경련 사건으로 하루가 지나가버렸다. 오늘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에서 돌아갔고, 왜 이렇게 아프게 된 것일까 생각했다. 그저 컨디션이 좋지 않아 생긴 증상이겠지만, 그래도 응급실까지 가게 된 이 상황을 나 스스로에게 설명해주어야 했다.

     

최근 이런저런 스트레스 상황이 있었다. 갑작스러운 회사 일들, 동료의 퇴사, 오랫동안의 진로고민, 엄마에게의 투정, 누적된 피곤함 등등. 말하지 못하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고,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고, 상황은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몸이 아파 쉬게 되었으면 좋겠다고까지 생각했었는데, 그런 게 쌓여 몸으로 나온 거 같았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아파보니, 건강이 최고라는 말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몸이 아프면 하고 싶은 것도, 어떤 고민도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저 아프지만 않게 해 달라는 게 최고의 소원이 되어버린다. 난 아프길 상상했던 나 자신에게 미안해하며, 이제 그런 상상은 하지 말자 했다.

그러다, 아프길 상상하면서까지 회사에 가지 않으려는 상황에 놓인 내가 안타까웠다. '뭣이 중헌디'. 아마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면, 난 안쓰러운 마음으로, 그곳이 맞지 않은 거 같으니 이직하는 건 어떤지 물어봤을 것이다. 그리고 누가 나에게 그렇게 물었다면 난 ‘좋은 대안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나의 부족함으로 생긴 이런 상황에 대해 자책하고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나에게도 내게 맞는 좋은 대안이 있기는 할까는 의심도 들지만, 그래도 이렇게 글을 쓰며 그런 곳이 있지 않을까 하는 소망을 가져본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고 싶게 만드는 곳에 있기를 다시 상상해 본다.     


지금, 아직은 조금 더 버티지 싶긴 하다. 이렇게 글을 쓰는 중간에, 내일 처음 가는 외부회의 안내문자가 온 것을 보고 준비를 했으니 말이다. 무사히 내일 또 하루를 보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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