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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HY Mar 24. 2024

오래된 사진 전하기

#21

난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편이다. 그래서 내 방엔 아주 많은 물건들이 가득하다. 십수 년 전 받은 편지, 전시회에서 사 온 엽서, 언젠가 쓸거라 생각하고 사둔 물건들, 언젠가 전해줘야히하는 선물 같은 것들이 쌓여있다. 그중에 하나는 2년 전쯤 친구에게 전해주려고 뽑아놓은 사진이 있었다. 8년 전즈음 찍은 친구 사진인데, 산책하는 모습, 지하철에 앉아있는 모습, 밥 먹는 모습 등 일상의 사진이었다.


그 친구와는 한 7년간 연락이 끊겼었다. 당시 특별한 일이 있었는가 하면, 글쎄...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의 만남은 이러했다. 평소처럼 만나고 있는데, 그 친구가 갑자기 '그렇게 엄마가 옆에 있으면 뭐든 했을 텐데 넌 왜 그러는 거야' 라 질문했다. 짧은 물음이었지만, 무언가가 담겨있었다. 난 무어라 답할지 몰라 당황한 채로 아무 말하지 못했고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난 오래된 과거와 싸우고 있었고, 부서진 세상 속에서 마음을 추스르고 있었으며, 아버지와의 갈등은 경계를 만들어 나를 막고 있었다. 무엇을 할지 모르겠고,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세상에 나갈 용기도 없어, 흐르는 시간을 바라보며 방황하고 있었다. 난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 여전히 문제 속에 있어 말할 수 없었고, 아직 말하고 싶지 않았고, 말하는 방법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친구는 내게 특별히 묻지 않았고, 평범한 일상을 오아시스처럼 선물해 주었다. 난 그게 참 고마웠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말할 수 있을 때 나도 그 친구처럼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힘차게 살던 그 친구에게도 버거운 상태가 왔던 거 같다. 오랫동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막 시작하고 있었고, 경제적인 상황을 홀로 해결하며 부담감을 감내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개인적인 일들을 감당하며 힘들었던 듯하다.


집으로 돌아온 후 이런저런 생각과 감정이 들었다. 놀랐고 아프기도 했다. 왜 그렇게 질문했을까, 난 뭐라고 답했어야 하나. 그러다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해 주었던 그 친구에게, 내가 먼저 말해봐야 할 거 같았다. 아직은 준비가 안 된 거 같기도, 외면하던 현실을 직면해야 는 것 같기도 해 두렵기도 했다.

난 용기를 내어 전화를 걸었고, 컬러링을 들으며 어떤 톤으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계속 고민했다. 하지만 음악이 끝나고 음성안내 메시지가 나올 때까지 전화를 받지 않았고, 회신도 오지 않았다. 그게 그 친구와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당시 난 존재가 부정당한 거 같았고, 갈 곳 없던 나는 더 갈 곳이 없게 되었다. 그 일 있기 얼마 전, 이사하고 아무도 초대하지 않던 집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 친구를 데려왔는데, 그게 영향이 있었나 하는 괜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아마 고마운 마음과 즐거운 추억이 많아, 더 아프게 다가왔던 거 같다. 하지만 어쩌랴. 결국 나의 방황으로 인한 것이고, 지금 그에겐 내가 필요 없는 것일 테니.


시간은 흘러갔고, 내게도 조금씩 변화가 일어났다. 과거를 서서히 받아들이며 조금은 힘이 생겼고, 하고 싶은 것들이 생기기도 했다. 어쩌다 보니 다시 일을 하게 되었고, 엄마와도 나아졌으며, 아빠와의 관계도 회복하며 지내게 되었다. 그 친구가 문득 생각날 때 덜컥 아프기도 했지만,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며 서서히 보내주고 있었다. 그러다 휴대폰의 사진을 보던 중에 그때의 생각이 났고, 사진들을 뽑게 되었다. 당시 무슨 생각으로 그 사진을 뽑았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인지, 아니면 그것을 전해주면서 그저 인사를 하고 싶었던 건지, 사진과 함께 완전히 보내고 싶었던 건지. 어쨌건 나는 다른 사진들과 함께 그 친구의 것을 뽑았고, 2년 넘게 방 한구석에 기약 없이 보관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달 전 주말에 그 친구이름으로 부재중 전화가 떴었다.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다. 회신을 해야 하나 싶다가, 그 친구가 실수로 잘못 누른 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몇 분을 고민하다, 전화를 걸었다. 이 참에 어쩌면 오랫동안 묵혀온 사진을 전해줄 수 있겠다 싶었다.


또르르르, 또르르르 , 수번의 연결음이 들리고, "여보세요"라는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예전 그 목소리였다. 오랜만이지만 오랜만이 아닌 듯 그대로였다. 갑자기 내 안에서 무언가 올라와 목이 막히는 거 같았다. 난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너무 밝지도 그렇다고 심각하지도 않은 어정쩡한 톤으로 인사를 하고 말았다.

그 친구는 여전히 그때 새롭게 시작한 일을 하며 잘 지내고 있다 했고, 당시에 자신이 힘든 상황이라 연락하지 못했다고 했다. 휴대폰에 이상이 생겨 전화번호를 다 잃어버렸는데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아 알게 되었고, 내가 전화번호를 바꾸지 않아  반가워했다.

나는 여전히 같은 곳에 살고 있고, 엄마는 건강관리를 하며 지내고 계시고, 아빠는 이 년 전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말했다. 그리고, 예전에 너의 사진을 뽑아놓았는데 전해주고 싶었다 했다. 그 친구는 자신의 일하는 곳을 알려주며 한번 놀러 오라 했고, 그렇게 우리는 8년 만의 인사를 마쳤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싶었다. 하지만 바쁜 일상이 몰아쳐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또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지났고 하루의 휴가를 보내게 된 날이었다. 갑자기 그 친구를 만나러 가야 할 거 같았다. 더 시간을 보내면 안 될 거도 같았고, 그 친구가 용기 내주었으니 이제는 내가 용기를 내야 할 차례인 거 같았다.

문구점에 들러 사진을 넣을 녹색 종이 한 장을 구매했다.  오늘 들려도 되는지에 대한 내 카톡을 읽지는 않았지만, 친구가 없어도 사진만이라도 두고 가자는 생각으로 출발했다. 휴대폰으로 봉투 접는 법을 검색해 사진을 포장했고, 제철과일인 딸기를 사서 그 친구의 일터로 향했다.

난 상가 2층으로 올라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책상에 앉아있던 친구는 처음에 나를 알아보지 못하다가, 동그래진 눈으로 내 별명을 부르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난 딸기와 편지를 건넸고, 넓은 테이블이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렇게 우리의 8년 만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길지는 않은 시간이었다. 그 친구는 그간 힘들었던 일과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이야기했고, 여전히 자신의 공간에서 일하는 게 신기하다했다. 나는 그간 내게 감동을 준 사람의 이야기를 했고, 오랜만에 전처럼 대화를 주고받는 순간이 신기했다. 웜홀을 통해 예전에 멈췄던 시간의 끝에서 바로 이동해 온 거 같았다. 서로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중 친구의 업무미팅 관계자가 왔고, 난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고 나왔다.

운전하고 돌아오는 길, 친구는 전화로 사진 고맙다며 다음에는 같이 밥 먹고 아야기하고 놀러도 가자 했다. 나도 얼마 전 차가 생겼으니 같이 놀러 가자 했다.


집에 도착해 방으로 들어왔다. 여전히 짐 많고 어지러운 방이었다. 가뜩이나 정리를 잘하지 못하는데, 최근 복잡한 마음에 에라 모르겠다 하며 그나마 하던 정리도 않고 있어, 내 방은 역대급으로 엉망인 상태였다. 그런데 오늘 작지만 커다란 하나가 제 주인을 찾아가며 작은 공간이 생겼다. 생각지도 못하게 난 오랫동안 묵어있던 방의 한 부분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준비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진심이었다면, 언젠가 그것이 자기의 자리를 찾을 때가 온다고, 그런 순간이 온다고, 내가 어쩌지 못하는 상황일지라도, 그때가 온다고. 그리고 그렇게 믿고 싶어졌다. 오래전 준비했던 친구의 사진이 마법같이 전해졌듯 말이다.


다시 방정리를 해할 거 같다. 그래야 좀 발 디딜 틈이 생길 거 같다. 쓰레기도 버리고, 오랫동안 쌓아온 쓸모없는 물건은 버리고, 추억이든 필요하든 보관하고 싶은 것은 잘 정리하고, 줄 것은 주고, 이불과 옷은  빨고, 봄옷으로 정리해야겠지. 크게 하지 못하더라도 작게 봄맞이청소는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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