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HY Feb 28. 2024

나에게 로얄젤리를 먹이기로 했다

#1

 나이를 먹어가고 어른으로 살며 부침을 겪다보면, 어린시절의 결핍을 되새김하게되는 때가 생기는 것 같다. 그리고 나역시 그런 시간을 열병처럼 앓았던 거 같다.


 어린 시절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어려워 매년 초 '올해는 잘 지낼 수 있을까' 걱정했던 내향적인 아이였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서 어쩌면 방치되듯이 키워졌던(물론 힘든 시절에 생각한 내 기준이다) 조용한 아이였고, 집에 돈이 없다고 하니 ‘난 괜찮아’하며 알아서 욕망을 거세해 온 아이였고, 그래서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할 수 있는지 알아볼 기회와 경험을 갖지 못한 아이였다.      


 그렇게 성인이 되었고, 다행히 공부는 못하지 않은 덕에 얼핏 무난히 사는 듯 보였지만, 실은 경험 부족의 상태로 세상에 나와 서툼과 실수로 범벅되고 무너지기도 하며 방황하였다. 그리고 어느순간 ‘나는 뭘 해도 안되는 사람’, ‘내가 하는 결정은 이상한 결정이어서 믿을 수 없어’라는 심한 자책의 수렁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TV에는 잘 나가는 연예인이 가득 나와 웃고 떠들며 있었고, 주변에는 사회에 적응해서 직장을 잡고 취미생활도 하며 여유롭게 지내는 사람들이 도처에 가득하게 보였다(아마 그 시설 모두 그렇게 보였으리라). 그리고 ‘저들은 많은 관심을 받고 기회를 가졌겠지’, ‘그래서 많은 성공경험을 하고 자신감이 장착되어 저렇게 살아가는 거겠지.’, ‘애초에 사회에 적응하기 좋은 성격으로 태어났겠지’란 비교의 생각이 가득찼었다. 그래서 더욱 나만 홀로 세상에 어울리지 못하고 덩그러니 놓여져 있는거 같았다.      


 그렇게 나는 ‘왜 이렇게 된걸까’하며, ‘나도 어린 시절 다른 환경에 있었다면’, ‘좀 더 많은 관심과 돌봄을 받았더라면’, ‘누군가 내 재능을 찾을 수 있게 해주었더라면’,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더라면’, ‘내가 원하는 걸 주장해보았더라면’이라는 수많은 ‘만약’의 도돌이표를 돌리며, 지난 시절에 대한 원망과 자학의 시간을 보냈던 거 같다.     


 한참동안 지난 시절을 복기하며 보내니, 어느순간 이미 훌쩍 커버린 내게 부모님이 그런 것을 해줄 수는 없고, 나역시 이제 그렇게 받아만 먹을 나이도 아니고, 우리집이 그런 여건도 안되는구나란 담담하고 깔끔한 현실이 읽혀졌다. 

    

 그리고 '나에게 그리해 줄 사람이 없고, 여건도 안되고, 나도 어린 나이를 지났구나....이렇게 내 인생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나는 끝나는 것인가...'라는 생각까지 가게 된 찰나였다.        


 갑자기 오래전 어디에선가 들었던 벌의 생태특성이 떠올랐다. 벌은 태어날 때 똑같이 태어나지만, 로얄젤리를 먹이면 여왕벌이 되고 그냥 꿀을 먹이면 일벌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문득 '아, 내가 나에게 로얄젤리를 먹이면 되겠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다른 이가 주는 먹이에 의해 커왔고 그 영향으로 살아왔다면, 이제는 내가 나에게 원하는 먹이를 주고 키우면 되겠구나란 생각이었다. 더는 다른 이로 인해 내가 이렇게 되었다고 변명조차하기 힘든 나이가 되어 억울하다 느껴질 때, 오히려 그때 다른이의 영향을 벗어나 내가 나에게 온전히 영향을 주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자 신기하게 조금씩 회색 안개가 걷히고 개이는 느낌이 들었다.

 '아하 그러면 되는거구나'.     


 그러고보니 나조차 내게 제대로 원하는 걸 해준 적이 없었다. 다른 이의 삶은 위하는데 정작 나에게 관심을 갖지 못했던 나였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내게 좋은 것을 주자',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관심갖고 지켜보고 좋아하는 것을 해볼 수 있게 해주자'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른 시선으로 나를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내가 뭐를 좋아했었지?, 뭐를 할 때 재밌었지?, 어떤 때 신났지?, 뭐를 해보고 싶었지?’.     


 그러자 아주 작은 것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릴 때 낙서했던 순간, 미술학원에 가는 건가 기대했던 순간, 멍하니 앉아 상상하던 순간, 춤을 추던 순간, 노래 목소리가 좋다고 칭찬받던 순간, 연기로 표현하는게 어떤가 관심을 가졌던 순간. 작지만 반짝였던 수많은 순간의 조각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생각만하고 시도하지 않았던 것들을 용기를 내어 아주 조금씩 해보기 시작했다. 원데이 그림클래스, '영화인물이 나라면'주제의 인문학 클래스, 영화모임, 5회 발레수업, 4회 글쓰기 클래스, 4히 그림책 클래스, 영화모임, 전시회 등. 그렇게 수년간 조금씩 아주 조금씩 무언가를 해주었다.


 그러자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나를 표현하고 싶다는, 책을 내고싶다는 전에는 없던 꿈들이 생기기도 하고, 무언가 이루고 싶다는 소망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진행형이다.


 앞으로 어찌 될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고, 이길을 내가 얼마나 걸어갈지는 모른다. 하지만 우선 지금은 나에게 잘해주고, 새로 생긴 작은 소망들을 소중히 간직하며, 조금씩 만들어가고 싶은 마음이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그렇게 만들어가길 바라고, 나는 늦게 시도하게 되었지만 다른 이들은 늦지 않게 찾아 오래오래 즐거이 걸어가기를 바란다.          


 그래, 나는 나에게 로얄젤리를 먹이기로 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