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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JANG Nov 06. 2019

허구의 시간

2008년 '마르셀 뒤샹 상'의 수상자인 프랑스 미술가 로랑 그라소(Laurent Grasso)는 "요즘 예술가들에게 가장 흥미로운 소재는 시간"이라 단언한 바 있다. 

패션 브랜드와 미술 작가의 콜라보가 심심찮게 성행하는 요즘, 파리 아랍 문화원에서 열린 디자이너 킴 존스의 2020s/s 디올멘 컬렉션에서는 작년에 이어 또 한 번 현역 아티스트와의 콜라보를 선뵈어 세간의 주목을 이끌어냈다.(작년에는 KAWS와의 협업으로 화제가 된 바 있음.) 디올멘을 이끄는 수장 킴 존스는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아티스트 '다니엘 아샴(Daniel Arsham)'과의 협업으로 색다른 런웨이를 선보였는데, 아샴은 디올이 여태껏 탄탄히 다져온 아카이브를 심도 있는 고찰을 통해 디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혼합한 새로운 시공간을 창조해냈다. 

Dior men's 2020 s/s paris collection

핑크색의 런웨이 위에는 디올의 이니셜이 풍화, 침식된 모습으로 거대하게 재현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마치 아득한 시간이 흐른 뒤 현재에 다다른 것만 같은 색다른 경험을 선사했고, 디올이 2000년도 봄, 여름 오뜨꾸띄르에서 선보였던 뉴스 페이퍼 프린팅이 새롭게 부활하여 런웨이를 수놓음과 동시에, 현재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애플의 에어팟 케이스까지 액세서리로 디자인되어 과거와 현재, 미래가 융화된 신비로운 컬렉션이 탄생하게 되었다. 

Daniel arsham, Hourglass, 2018

뉴욕 기반 아티스트 다니엘 아샴의 작업은 <허구적 고고학>이라는 이름으로 현시대에 존재하는 사물들과 문화를 석고나 대리석과 같은 고형물을 이용해 시간이 흘러 자연 풍화되고 침식된 모습으로 연출하는 방식을 주로 사용한다. 가령 테디베어 인형이나, 레이카의 카메라, 아디다스의 운동화 등이 마치 아득한 시간이 흐른 뒤 발견된 고대의 유물처럼 풍화, 침식된 형태로 새롭게 재현되는 것이다. 관객은 이를 통해 먼미래로 시간 여행을 온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현재의 모든 사물과 문화는 어느덧 과거의 유물로 변이되는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됨으로써 현재를 더욱 강렬히 마주하게 된다. 이외에도 다니엘 아샴은 오브제가 들어있는 모래시계를 일정한 주기마다 반복 회전 시킨 작품으로 '시간의 덧없음'을 표현한다든지, 화산재로 만들어진 구식 전화기와 카메라가 등장하는, 인류 문명이 멸망한 아포칼립스 이후의 시대 배경을 영화로 제작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서 거대한 시간의 흐름에 대한 자신의 고찰을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무엇보다 현재가 가장 중요함을 상기시키는 다니엘 아샴의 작품 이면에는 긍정적인 미래보다는 디스토피아적 상상의 미래가 늘 전제돼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인간은 어쩌면 예견된 밝은 미래보다는 어둡고 불확실한 미래를 통해 나태함과 안일함에서 구원받고 현재를 충실히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다니엘 아샴은 현재 <허구적 고고학>이라는 주제를 통해 디올 외에도 리모와, 코스, 아디다스 같은 브랜드를 비롯하여 퍼렐 윌리엄스와 같은 거물 아티스트와의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몇 년 새에 세계가 주목하는 동시대 미술가로 급부상하게 됐고, 미술 외에도 건축과 디자인의 영역까지 활발하게 활동하며 그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있다. 이 젊은 예술가가 앞으로 만들어갈 시간은 어떤 모습이고 그 시간을 우리에게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선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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