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겨버린 마음
나는 예전에 매우 소심한 아이였다. 지금도 그런 면이 있지만 그때는 더 작았었다.
고등학생 시절 어느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박스 테이프 몇 개를 학생들 앞에 우르르 떨구더니 이걸로 너희가 표현하고 싶은 그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테이프의 본질적 기능을 떠올리지 말고 무엇이든 만들어 보라 하셨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테이프가 끝없이 기다랗게 펼쳐지는 모양새가 곧 끈, 리본의 형태와 비슷하다고 연상했고 망설임 없이 일어나서 테이프 하나를 집었다. 교실은 선물이었고 테이프를 리본 모양으로 만들어 마치 선물 포장처럼 만들어 볼 계획이었다.
오돌토돌한 흰색 벽에 테이프 시작 부분을 턱 붙이고 한쪽 팔에 건 뒤, 성큼성큼 맞은편 벽을 향해 보폭을 크게 하여 발걸음을 내디뎠다. 팔에 헐렁하게 끼운 테이프가 쩌저적하는 소리와 함께 핑그르르 쳇바퀴처럼 빠르게 회전했다. 찢어지는 잡음이 꽤 오랫동안 들려서였을까 순간 선생님과 아이들의 이목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건너편 벽에 마침내 닿았고 테이프를 잘라 떨어지지 않도록 손톱으로 야무지게 긁으며 부착했다. 이제 막 세로축을 붙이려고 신이 나서 테이프를 다시 뜯는데 그 순간 누군가의 비아냥이 가슴에 쿡 박혔다.
"야~ 자기들 거 아니라고 그냥 테이프를 막 쓰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선생님이었다. 17살의 나는, 나를 저격한 한 마디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너무 당혹스러워서 목구멍에 말이 걸려 나오지 않았다. 어찌할 바 몰랐던 나는 그런 식으로 쓰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여 헝클어진 마음을 미처 정리할 새도 없이 결국 테이프를 떼서 휴지통에 버려버리고 말았다.
다른 아이들은 나름대로 결과물을 냈고 각자 자리에 앉아 공개적으로 피드백을 들었다. 그러다가 그 선생님은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테이프의 기능적 측면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결과들이 많네. 상상을 좀 해 봐. 예를 들어 이 공간을 리본처럼 묶는다든지..." 그 말 이후 수업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억울했고 화가 났고 속상했고 가장 크게는 그 순간에 반박하지 못해 스스로를 지키지 못했던 내가 원망스러웠다.
"아까 그거 제가 리본 하려던 거예요." 라든지 애초에 "테이프 자유롭게 쓰라면서요? 저 리본 만들 거라 많이 필요해요." 내지는 "저 리본 만들려고 했는데 선생님이 막 쓴다고 뭐라고 하셨잖아요?" 등의 목소리 한 마디를 못 내고 분한 감정만 얼룩처럼 남은 수업으로 각인되었다.
나를 지키는 주장을 피력하는 것이 지금까지 어렵다니 큰일이다. 싸우자는 것도 아니고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며 우기는 것도 아니고 그저 스스로 다치지 않도록 힘주어 말하는 것이 여태까지 힘들 줄이야. 부당하면 부당하다고 말해야 하고 이유 없이 맞으면 때리지 말라고 반격해야 하는데 치명적일 정도로 이 부분에 대해서 연약하다. 항상 시간이 지나 뒤돌아보며 당시 감정에 압도되어 반사적으로 악쓰지 못했던 것들이 후회로 남는다. 나도 내 목소리를 내고 싶다. 권위에 연륜에 능력에 관계에 눌리지 않고 소신껏 말하고 싶다.
그거 아닌데요?
하지 마세요
저에게 이러는게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저 지금 바빠요
너무하다고 생각되는데요
이러는거 아니죠
그건 제 상식에 어긋하는 행동입니다
이제 지랄 발광 네 살처럼 살아야겠다.
난 이제 네 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