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나는 그날의 나를 생각하면 입가가 씁쓸해져.
온 세상이 너로만 가득하다고 믿었던, 네가 나의 전부였던 그 시절의 나는 언제라도 네가 떠날까 봐 매일 손톱을 뜯으며 지냈어. 덕분에 내가 그나마 가장 마음에 들어 했던 손가락이 자꾸만 미운 모습으로 변해갔지. 나를 좋아해 준다는데 불편한 마음은 숨겨야지. 이런 나를 좋아한다는데 네가 싫어하면 하지 말아야지.
그런데 말이야 한없이 낮은 자세로 너를 대했던 나를, 얼마 지나지 않아 이내 지겹다는 듯 오히려 함부로 취급하기 시작했어. 거친 말에도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고 감정이 없는 눈빛으로 날 흘기듯 훑어보는 순간에도 나는 미소를 지었어. 혼자되면 감당할 수 없는 처절한 외로움이 파도처럼 덮칠까 봐 오지도 않은 미래가 내 코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초조함을 끌어안고 살았어. 뭐가 그렇게 미안했는지 지금 떠올려 보면 잘못한 것도 없는데 ‘미안해’라는 말을 ‘사랑해’처럼 하고 다녔지.
하루는 장미꽃을 선물해 주더라? 다발도 아닌 그깟 꽃 한 송이에 함박웃음을 띠며 연신 예쁘다며 고마워한 나를 보며 너는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어쩐지 집에 와서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낮에는 보지 못했던 꽃의 상처가 보이더라. 21살의 나는 제값도 못했던 한 송이 꽃과 같았을까.
아직도 나는 그날의 나를 생각하면 입가가 씁쓸해져.
결국 너는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며 후련함일지 후회일지 모를 복잡한 표정으로 뒤돌아 걷기 시작했어. 나는 덜컥 겁이 나 쿵쾅거리며 쫓아갔지. 할퀴듯 너의 티셔츠를 잡아당기는데 죽 늘어나는 옷자락을 움켜쥐며 너는 짜증을 확 쏟아냈어. 어이없게도 나는 그 순간조차 미안하다고 외마디 소리쳤어. 나는 뭐가 그렇게 미안했는지. 미안하다는 행간 속의 진짜 의미를 너는 알고 있었을까. 돌아오는 그날은 햇볕이 뜨겁다 못해 따가웠어. 햇빛조차도 나에게 내 탓이라며 화를 내는 것 같았지. 길을 따라 걷다가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축 처진 장미와 마주쳤어. 꼭 내 모습 같더라. 무언가 울컥 올라와 아무도 없는 구석진 곳에 가서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울었어.
너의 기억 상자 속에 나는 없겠지. 있어도 빛바랜 사진이거나 잉크가 날아간 한 줄짜리 메모로 남아 도대체 이게 뭐였지 하며 버릴 거야. 차라리 그게 좋겠다. 마침 나도 영영 없애고 싶었던 장면이거든. 나는 이제 잘 지내고 있어. 더 이상 예전의 연약했던 내가 아니야. 장미를 보면 예쁘다고 말할 줄 알게 되었어. 입가는 쓰릴지언정 당시의 나를 보듬어 줄 수 있게 되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