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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옹심이

즉흥적으로 마주친 로컬 찐맛집

by 정확한느낌

대학생이었던 어느 여름날, 방학 기념으로 강원도 기차여행을 떠났다. 동기와 둘이서 갔던 1박 2일 짧은 일정이었다.

가장 큰 목적은 바다에서 튜브를 타고 해수욕을 하는 거였다.

정말 어렸을 때를 지나고는 바닷물에 온몸을 풍덩 빠뜨려 놀았던 기억이 없었던 터라 들뜬 마음에 기대감이 컸다. 우리는 해수욕장에 도착해 튜브와 파라솔을 대여했다. 물놀이를 하다가 출출해지면 먹으려고 샀던 그 유명한 닭강정 한 상자와 콜라 한 병이 있었기 때문에 비쌌지만 우리는 평상과 그늘이 필요했다. 타지 않으려고 챙겨간 모자와 얇은 긴 팔 옷이 무색하게도 한 여름 태양빛을 이길 수는 없었다. 얼마나 신나게 놀았을까 꽤 많았던 닭강정을 먹고도 여전히 허기가 돌았다. 얼굴은 따갑고 팔다리는 소금물에 끈적거렸다.

아, 가만 보니 까마득히 오래전 일이라 물놀이 전이였는지 후였는지는 어렴풋하다.

그러나 이 기억만큼은 선명하다.


'감자옹심이'

강릉은 감자옹심이와 장칼국수, 순두부로 유명하다고 했다. 짐을 챙겨 전통시장을 찾아갔다.

집에서 출발하기 전부터 찾아두었던 감자옹심이 집은 시장 주변 어딘가 위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초행길이었던 여행객은 복잡한 시장길에서 음식점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이제 시끌벅적한 시장 구경은 그만하고 어디 앉아서 맛있는 걸 먹고 싶었다. 아무 곳이나 들어가서 늦은 점심이라도 먹을까 하는 투정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찰나, 관광객으로 보이는 한 아주머니가 길목에서 나물을 팔던 할머니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할머니, 여기서 제일 맛있는 옹심이 집이 어디예요?"


귀가 번뜩 뜨였다. 몇 년 아니 수십 년을 여기서 장사해 오신 분이 가리키는 그곳이면 정말 맛집이겠다는 생각에 너나 할 것 없이 동시에 그 할머니 두 눈을 간절한 염원을 담아 쳐다보았다. 마치 독무대에서 다음 대사를 준비 중이던 배우에게 핀라이트가 내리꽂듯이 우리의 시선이 한 곳으로 집중됐다. 주인공 할머니가 한 손으로는 다듬던 나물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공중을 휘적거리며 뭐라고 하셨다. 소리가 흩어져 우리는 듣지 못했지만 질문을 했던 아주머니는 알았다고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친구가 나에게 속삭였다. "따라가자." 뭐에 홀린 듯 좁디좁은 골목을 꺾고 돌고 아주머니를 놓칠세라 빠르게 쫓아갔다. 그러다가 조금 트인 골목에 다다랐고 정말 아는 사람들만 갈 것처럼 보이는 감자옹심이 음식점에 도착했다.


특이한 구조였다. 사람들이 오가는 골목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음식점이 있었다. 간판도 메뉴판도 뭐도 없었다. 앞서갔던 아주머니가 먼저 자리하고 우리도 안내를 받아 앉았다. 퉁퉁한 사장 아주머니는 수더분해 보였다. 현란한 꽃무늬 패턴의 반팔 원피스를 하고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저쪽에서 사장님이 요리를 하고 이쪽으로 서빙하는 구조였다. 손님들이 앉는 공간은 정말 누구네 거실 같았다. 감자옹심이 2인분을 주문했다. 활짝 열어놓은 미닫이 문 사이로 여름의 열기가 그대로 들어왔다. 저 멀리 시장 소리가 아스라이 들렸고 머리 위로는 선풍기가 돌아갔다. 선풍기가 회전하는 박자에 맞춰 바람이 불었고 그때마다 나풀거리는 잔머리를 정리해야 했다. 한참 걷다가 드디어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기에 노곤노곤했다. 은근 오래 기다렸다. 건너편 집 주방에서 사장님이 트레이를 들고 우리 쪽으로 오려는 게 보였다. 길목을 후다닥 건너서는 트레이를 마루에 밀어 놓고 슬리퍼를 벗고 한 계단 힘겹게 올라오셨다. "아휴, 내가 무릎이 안 좋아. 손목도 아파. 혼자 하는데 너무 힘들어서 그래서 장사를 접으려고 했어. 원래는 저기서만 했는데 저기 자리를 없애고 여기로 옮겼어." 이만한 스텐 트레이에는 작은 장독대 모양의 그릇에 옹심이가 한가득씩 담겨있었다. 두어 번 왔다 갔다 하시는 동안 우리도 옹심이를 받았다.

자칫 기울이면 넘칠세라 찰랑거릴정도로 꽉 차있었다. 그날은 태어나서 감자옹심이라는 걸 처음 먹어보는 날이었다. 맛과 식감이 어떤지 전혀 정보가 없었지만 시장이 반찬이라고 본능적으로 한 입 먹었다.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아무 말 없이 두 번째 숟가락을 들었다.


전분끼가 도는 옹심이는 겉 부분이 살짝 투명색이었고 쫄깃거리는 식감 또한 예술이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거친 식감의 감자떡이랄까. 녹진하고 뜨끈한 국물에는 잘게 채 썬 애호박, 당근, 양파가 실하게 들어있었다. 그날 그렇게 먹은 옹심이가 내 인생의 원탑 옹심이가 될 거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을까.

정신없이 먹는 동안 사장님은 누구네 거실 같은 마루에 있던 김치 냉장고를 열어 갓 꺼낸 배추김치를 숭덩숭덩 잘라 테이블마다 주셨다. 아.. 이 김치도 최고였다. 겉절이와 익은 김치의 중간맛이었던 시원한 김치. 옹심이로 후끈거리는 목구멍을 아삭한 김치로 달랬다.

어린 시절 친구가 나를 초대했는데 막상 가보니 친구는 없고, 친구 할머니가 직접 만들어주신 집밥 느낌이었다. 따뜻했고 귀했다.


그 시장 그 할머니는 지금까지 장사를 하고 계실까 문득 떠오른다.

아마 우리가 가고 나서 얼마 뒤 접지 않았을까 싶다.

이제는 가고 싶어도 먹고 싶어도 추억에서만 누려야 할 옹심이 집이 되었겠지.



(사진은 글에서 언급한 음식점과 무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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