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정리] 우리는 왜 사는가

정답이 없는 질문에 대하여

by 페릴러


1) 철학, 인생관, 가치관


철학, 인생관, 가치관. 나라는 인간을 어느 정도 정의할 수 있는 관념. 솔직히 이 단어들을 정의하는 것부터 어렵다. 누구나 이 세상을 바라보는 틀과 관점, 삶을 살아가는 방법, 가치판단의 기준 등은 존재한다. 하지만, 이것들을 정확히 인지하고 고민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에 더해 이것들을 또 글로 작성하고자 하니, 각 단어에 맞춰 정의가 필요하고, 막상 하려고 하니 어렵다. 그래서 각 개념에 대해 AI와의 몇 번의 대화를 통해 나온 축약된 정의는 다음과 같다.


철학 (Philosophy): '왜?' / 나와 세상을 이해하는 근본적인 관점과 생각의 틀.

인생관 (View of Life): '어떻게?' / 삶을 어떤 방향과 태도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자세.

가치관 (Values): '무엇을?' / 무엇이 더 중요하고 옳은지 판단하는 내면의 기준.


이에 대한 각자의 답을 정의할 수 있게 하는 질문엔 다양한 것들이 있다고 본다.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바로, “우리는 왜 사는가?”와 “나는 누구인가?”이지 않을까 싶다. 내가 처음 작성하고자 하는 것은, 내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이면서 평생 바뀌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왜 사는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이며, 이에서 기인한 인생관에 대한 기록이다.


서술하기에 앞서 조심스러운 것은 '나'의 철학 등이 내게는 소중할 수 있지만, 생각이 다른 ‘타인’이 보기에는 어찌 보면 유치하거나 하찮은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개똥철학이라는 말도 생겨나지 않았을까. 그래서 이런 글을 쓰는 것이, 나만의 답을 냈다는 자랑스러운 면을 드러내는 것이면서도, 타인에게 공개하는 것은 어쩐지 부끄럽다. 그렇지만 정제된 글로 남기지 않는다면, 계속 생각으로만 남겨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그동안 가져온 내 고민들에 대해 글을 통해서 다시 정리한다는 생각으로, 용기 내어 작성해 본다.


시작은 사람들과 인생에 관한 얘기를 나눌 때 종종 하는, 내가 답을 얻었던 그 순간에 관한 얘기로 시작해보고 싶다.




2) 깨달음의 순간


때는 26살의 1월, 나는 인생을 1년에 함축해 산 것 같은, 워홀을 마무리하며 호주를 한창 여행하고 있었다. 당시 나의 머릿속에는 2년간의 혼돈의 대학 생활에 대한 허망함, 2년간의 군 생활 당시 읽었던 책들에서 기인한 고찰, 나의 껍데기를 깨준 2년간의 해외 생활을 통해, 복합적인 생각들이 휘몰아치던 중이었다. 그런 생각에서 기인했는지,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왜 사는가?'에 대한 질문을 끝없이 되새김질했다. 그러면서 마냥 걷고 걷는 여행을 지속하였고, 그때도 한없이 펼쳐진, 끝이 안 보이는 골드코스트의 해변가를 따라 걷고 걸었다. 그렇게 마냥 해안가를 따라 쭉 걷다가, 해안가에 있는 언덕을 올라 다시 끝도 없는 해변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그 순간.


나는 "우리는 왜 사는가"에 대한 '궁극적인 물음'에 대해 스스로 대답을 얻었다.


그 대답은.

누군가에겐 당연할 수 있고,

누군가에겐 허무맹랑하고,

누군가에겐 유치하고,

누군가에겐 말도 안 될 수 있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얘기했던 답이다.

어쨌건 내게 중요한 건 그것을

'스스로 깨달았다’는 것이며,


그때.

내가 찾은 답은.



"그딴 건 없다."



는 것이었다.


내 삶의 근간을 이루는 철학적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온 순간이었다.




3) 그딴 건 없다


그딴 궁극적인 목표 따윈 없다. 거기서부터 내 생각은 분수처럼 쏟아졌다. 난 ‘대답이 없는 것’에 대한 ‘정답’을 찾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전까지의 나는 '왜?'라는 질문에 사로잡혀,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찌 되었건 내가 알 수 없는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삶의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다 믿고 있었다. 하지만 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런 궁극적인 목적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태어난 것은 그저 우연인 것을.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따르자면, 모든 생명체는 단순히 DNA가 자신을 스스로 번식시키려는 법칙에 의해 행동하는 존재이다. 우주적인 범위에서 볼 때 우리는 그저 우연으로 태어났을 존재인, 분자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존재일 뿐이다. 우리는 그냥 태어난 것이며, 보편적이며 궁극적인 삶의 목적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냥 이 광활한 우주에서 '우연히'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도달한 결론이었다. 무신론자며 무교인 나는 그때서야 불교에서 설파하는 "공(空)"사상에 대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목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인생은 그렇게 당장 그만두어도 그만인 허무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극단적인 결과로 이끌 수 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각자만의 삶의 목적을 찾아 설정한다. 그리고 그 목적이 본인이 태어난 궁극적인 목표라고 믿으며 삶을 살아간다. 그렇지 않으면 사유하는 존재, 인간은 삶에 대한 목적성을 잃게 되며, 고통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스스로 생을 마치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가족, 명예, 사랑, 세상을 바꾸는 것, 순간의 욕망, 부, 종교, 종족 번식, 봉사, 행복, 헌신. 인간들은 각각 다양한 목적을 위해 살아간다. 각자 다른 이유로, 종교에 귀의해 신을 섬기거나, 세상을 바꿔보려 하거나, 봉사에 헌신하며 사랑을 전파하거나, 부귀나 권력의 성취를 좇거나, 자기 자신에게 빠져 살거나. 아니면, 평생을 본인의 답을 찾으며 살아가거나. 그럼 나는 어떤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아 살아가야 할까. 그렇다. 이제부터 문제는 “왜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4) '왜'에서 '어떻게'로


이때의 깨달음은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우리는 왜 사는가”에 대한 생각을 소멸시켜 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이때의 통찰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이후의 내 삶에 대한 방향성이 “나는 왜 사는가?”에 대한 철학적 질문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인생관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왜”가 “어떻게”로 바뀐 이 전환이 중요한 이유는, 인생과 나 사이의 주도권이 나에게 넘어왔기 때문이다. 즉, 삶을 “왜”라는 주어진 목적에 따라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를 주체적으로 정하는 것이 삶이라는 관점으로 변경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평생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나의 인생관이자 내 가치관을 세우고 있는 가장 중요한 축이 되었다.




5) 모두 다른 각자의 답


어떤 철학, 가치관, 인생관 등은 누군가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발굴해 나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각자에게는 자신만의 답이 있으며, 이 세상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본인이 인생의 답 혹은 더 나아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들을 설파하는 사람들이 항상 존재해 왔다. 그것을 글로 읽거나, 다양한 미디어로 접하며 영향을 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본인이 스스로 그것을 성찰하여 깨닫기 전까지는 크게 와닿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내게 26살의 1월이 중요한 이유는 그에 대한 답을 내가 스스로 생각하다가 깨우쳤기 때문이다.


내가 스스로 깨우쳤다는 것을 반복하며 강조하는 이유도, 그만큼 각자가 각자의 답을 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전엔 헛소리라 생각하고 넘어가거나, 무슨 소린지 이해 못 할 얘기들도, 나만의 답을 내고 난 다음부터는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내 글이 헛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수도 있지만, 아무렴 어떤가? 나의 답이 이런 것을. 다만 이 대답을 얻은 후로 내 생각은 더욱 유연해졌으며, 많은 부분에 대한 철학적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단 것이다.


혹시 그대가 이 긴 글을 아직도 읽고 있고, 내가 했던 질문을 당신도 아직 하고 있다면 언젠가 본인만의 답을 찾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