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 목 끝까지 차오르는 무지개 산과 조수석 쟁탈전
6. 비니쿤카 가는 길 – 괜한 선행이 만든 불편함
마추픽추 현장 발권에 실패할 사태를 대비해 쿠스코에서의 일정을 하루 더 잡아 놓았는데, 성공적으로 보고 와서 시간이 남았다. 이를 활용하여 비니쿤카라는 무지개 산 투어에 참여하기로 했다. 다채로운 색을 가진 산이라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침 내가 쿠스코 공항에 발을 디딘 날 이용했던 우버 아저씨가 여행사도 하셔서 영업을 당하고 명함을 받았다. 그런데 오히려 인터넷으로 예약하는 것보다 더 저렴해서 그때 받은 명함으로 해당 투어를 예약했다. 마추픽추에서 돌아온 다음 날 새벽, 투어 승합차가 나를 픽업하러 왔는데 뒷자리는 만석이었기에 마지막 빈자리인 조수석에 앉았다. 운전자와 나 사이에는 가이드분이 앉으셨지만 공간이 나름 넉넉했다. 차를 타고 두 시간 정도 갔던 것 같은데, 중간에 아침을 먹으러 갔다. 아침을 다 먹고 차에 오르려는데 그때 혼자 온 미국인 여성이 나한테 자리를 바꿔 달라고 했다. 그것도 가이드를 통해서 말했다.
이때 칼같이 거절해야 했다. 나는 그냥 호구였다. ‘해봤자 얼마나 불편하겠어, 얼마나 멀리 가겠어’ 그런 생각에, 또 거절을 잘 못 하는 성격 탓에 상석을 내주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냥 자기가 불편하게 앉기 싫어서 나한테 자리를 바꿔 달라고 한 거였다. 바꿔준다고 대답할 때는 몰랐는데, 원래 이 사람이 앉은 곳은 가장 뒤편에 가운데 좌석이었다. 미니버스에서 제일 안 좋은 좌석을 생각하면 된다. 이 사람은 심지어 나한테 아무 자리나 빨리 차지하라고 종용하였다. 자기는 남의 자리를 뺏는 껄끄러운 상황을 피하려고 가이드를 통해 나를 희생양으로 삼았으면서, 나에게는 왜 남의 자리를 뺏도록 했을까. 하필이면 맨 뒤에는 덩치가 큰 사람들만 있었는데, 나도 한 덩치 하기 때문에 2시간 동안 몸을 구기고 있어서 쉬지도 못했다. 또 가는 길에 방목 중인 귀여운 라마와 알파카들이 많이 보였는데, 내가 앉은 곳에서 잘 보일 리가 없었다.
그렇다. 나는 거절을 못 한 대가로 2시간의 불편과 좋은 경관을 볼 기회를 놓친 것이다. 좋게 생각하면 그 사람에게 양보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리 착한 사람이 아니다. 여기서 또 배웠다. 괜한 호의를 베푸는 것이 능사가 아니란 것을. 자신을 위해서는 거절을 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앞으로는 이런 부탁을 받아도 자신을 위해 칼같이 거절해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했다. 돌아올 때는 반드시 나의 자리를 되찾으리라 마음도 굳게 먹었다.
7. 완만한 각도로 나를 탈탈 털어버린 산행길
구겨진 채로 불편하게 두 시간 정도를 달린 뒤, 비니쿤카의 초입에 도달했다. 우리가 내렸던 시작점의 높이는 4,500m가 좀 안 되는 정도였다. 솔직히 여기에 올 때까지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든지 하는 고산병의 징후는 없었다. 숨을 더 깊게 쉬어야 할 것 같은 느낌만 있었다. 등산로를 봤는데, 겉으로 보기에 산이라기보다는 완만한 비탈길에 가까웠다. 게다가 정상의 높이가 해발고도 5,036m라니, 겨우 500m 정도만 올라가면 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올라가는 데만 두 시간 정도를 줬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금방 끝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 자신감에는 나름대로 근거가 있었는데, 운동을 거의 매일 하는지라 체력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수도권에 있는 산들은 쉬지 않아도 한 번에 오를 수 있는 체력이었기에 1시간 정도면 충분하리라 판단했다. 그러나, 이때의 나는 처음 경험하는 ‘높은 해발고도’라는 변수를 전혀 고려하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만만하게 출발했다. 앞에 펼쳐져 있는 풍경이 아름답기 그지없었으며 무지개 산을 보기 위해 신나는 마음으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얼마 못 가서 숨이 가빠오고 다리가 모래주머니를 단 것처럼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심호흡하듯이 큰 숨을 쉬어야 했고, 발걸음은 점점 느려지더니 조금씩 뒤처지기 시작했다. 그저 경사가 낮은 비탈길이라고 우습게 봤는데 우스운 꼴이 된 것은 나였다.
반면, 노새를 부리는 원주민분들은 너무나 자유롭게 뛰어다니고 계셨다. 값을 내고 노새를 타고 산을 오를 수도 있겠지만, 내 힘으로 이루어 내고 싶은 마음에 그런 유혹은 전혀 없었다. 그래도 도저히 쉬지 않을 수가 없어서 중간에 숨을 몇 번 고른 후, 오기로 산행을 계속했다. 그렇게 완만한 길을 겨우 끝내니, 이제는 정상을 위한 진짜 오르막길이 나왔다. 이 등산이 정말 인생에서 가장 힘든 산행길이었다. 겨우 10m 움직이는 것도 인터벌 트레이닝을 하는 것처럼 힘들었다. 거의 기어가듯이 조금 갔다가 쉬면서 큰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어야 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을까? 완전히 곤죽이 되어버린 나는 드디어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해발고도 5036m의 정상. 살면서 발로 디딘 곳 중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다.
무지개 산이라는 명성에 맞게 다채로운 산의 색은 신비로웠다. 인위적으로 색을 만든 것이 아니라, 토지의 다양한 암석으로 저런 색을 내는 것이라고 한다. 자세히 보면 총 7가지 색을 띤다고 하는데,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빨주노초파남보의 색은 아니고 고유한 광물들의 색이다. 그리고 그 산의 반대편으로는 만년설이 보이기도 해서 아름다움이 배가 되었다.
8. 하산 후 아픈 몸을 이끌고 탈환한 조수석
아름다운 산을 뒤로하고 하산하는 길은 나름 수월하였다. 가파르지 않았기에 무릎에 무리가 갈 일도 없었고, 해발고도는 점점 낮아지니 조금이나마 숨을 쉬는 게 편해지는 것 같았다. 하산하면서 하트모양의 호수도 눈에 들어왔다. 무사히 출발지점으로 돌아오니 갑자기 배가 아프기 시작해서 폭풍 설사로 속을 다 비워냈다. 이에 더해 높은 강도의 운동으로 인한 줄 알았던 두통은 가시지 않았다. 아마 이것이 고산병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픈 내게 중요한 것은 편안하게 복귀할 수 있는 앞자리를 탈환하는 것이었다. 아까 도착해서 내리자마자 가이드에게 돌아갈 때는 무조건 앞에 탄다고 말했다. 가이드도 내가 껴있는 모습을 측은하게 보았기 때문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내가 자리를 양보해 준 사람이 보란 듯이 먼저 도착해서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가이드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고 절대 뒤에 못 앉겠다고 가이드에게 다시 말했다. 가이드는 나와 그 사람이 나란히 앞에 앉을 수 있게 해 주었는데, 내가 앞에 앉으려고 차 문을 여니까 자리를 양보받았던 사람이 당황하며 보인 반응에 어이가 없었다. ‘여기 내 자린데?’ 역시 선의는 아무에게나 베푸는 것이 아니었다. 나도 앞자리에 같이 타고 가이드가 뒤에 앉는 것으로 정리해 줬다고 하니까 그제야 잠잠해졌고 나는 조수석을 되찾았다.
원래는 돌아가는 길에 밖에 있는 라마와 알파카들을 보고 싶었는데 체력이 고갈된 채로 두통까지 겹치니 졸음이 쏟아졌다. 이동하는 내내 잠이 들었고 밖의 풍경은 볼 수가 없었다. 다행인 건 이 휴식이 효과가 있었는지 쿠스코에 돌아오니 꽤 회복되었다. 그래도 뭐를 더 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기에 마트에서 기념품과 요깃거리를 산 다음 숙소로 복귀해서 휴식을 취했다. 다음 날 페루의 마지막 일정인 쿠스코 여행을 위한 체력 비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