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피로 쓴 사랑의 시

<나 혼자 본다 17>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展

by per se

국제갤러리 <Rocking to Infinity> 20250902-20251026

호암미술관 <덧없고 영원한 (The evanescent and Eternal)> 20250830-20260104


혈연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하는 요즘입니다. 나이가 들면 부모와 멀어지면서 가족이라는 일원으로서보다, 완전한 객체로서의 삶을 더 많이 생각하고 살게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 난 뒤 아이도 모시고(...) 부모님도 모셔야 하는 나이가 되면서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게 결속된 가족이라는 인연의 힘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가장 조용하고 집요하게 나를 지배하지만 그래서 외면하고 살고 싶어지는, 그러나 그럴 수가 없는 가족과 부모라는 이름.

특히 평범한 가정에서 특별히 대단한 이벤트 없이 지냈던 유년 시절을 생각해 보면 겉으로는 조용히 잘 자랐다 싶지만, 엄마와 싸우고 '스무 살이 되면 반드시 죽겠다'라고 일기장에 써 내려가던 시절이 있었던 것을 보면 역시 날마다의 일들을 기억 못 하고 미화시키게 되는 것인지, 매일의 집구석과 마음 구석 소음들은 어쩔 수가 없었나 봅니다. 그놈의 공부를 위해 비교적 착실하게 살다가도, 조금이라도 부모 기대에 벗어날 때 나는 딸이 아니구나 생각했던 때도 있었고, 나와 달리 뭐든 잘했던 형제 덕에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콤플렉스에 젖어 살았던 때도 있었습니다. 아, 생각하고자 하면 생각이 나긴 나네요.

그러나 굳이 기억을 찾아가지 않아도 나를 습격하는 과거의 기억까지 마음으로 물고 녹여먹을 시간이 없습니다. 떠올리든 떠오르든 그때의 기억은 순간 스쳐갈 뿐, 눈앞의 일상적 과업을 해내는 것조차 버겁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그나마도 평범하게 잘 살았다는 유년 시절의 증거일지도요.


10월 기준 삼청동 국제갤러리와 호암미술관에서 동시 진행 중인 루이스 부르주아 전시를 보면 누구나 자신의 유년 시절이나 비슷한 경험을 꺼내볼 것입니다. 두 전시 베뉴에는 비슷한 작품도, 서로 전혀 다른 작품들도 다수 있습니다. 루이스 부르주아를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도, 그중에 국제갤러리 K3 관에 들어서면 아마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작가인지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녀의 대표작이라 할 수는 없지만 작품 전반에 걸쳐 다루어온 주제가 담겨 있기 때문일 겁니다.

<국제갤러리 K3에서 전시 중인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들. 각기 다른 작품들이지만 '관계맺음'에 대한 이야기다.>

사방의 벽에 작은 액자들이 걸려 있고 그 안엔 선연한 핏빛 드로잉이 담겨 있습니다. 100세까지 살았다는 루이스 부르주아의 생애 후반기 작품들은, 죽음에 가까운 지점에서 생명의 탄생과 관계 맺음을 오히려 더 선명하게 그려냅니다. 시작점부터 찬찬히 걷다 보면 깊은 유대관계를 맺었던 조수와의 교감을 형상화한 작품들, 그리고 남성과 여성이 관계를 맺고 아이가 잉태되어 자라서 몸 밖으로 나오기까지의 과정들이 보입니다. 사실적이고 보통의 이야기이며 어찌 보면 그래서 너무 평범한 이야기인데, 붉은 색상 때문인지 보는 이들에게 이따금씩 편두통 같은 강렬한 통증을 줍니다.


<국제갤러리 한옥 전시실의 작품들. 커피 필터에 그린 그림들이 전시실의 분위기와 잘 어우러진다.>

같은 갤러리 한옥 전시실에서는 그녀가 커피 필터에 그린 그림들이 있습니다. 살면서 그녀의 손에 가장 자주 손에 닿는 물건 중 하나였을 커피 필터는 물감을 흡수하고, 은은한 빛을 내뿜으며 적당히 번져 나가 자연을, 추상이 된 마음을 그리고 있습니다. 작품의 아름다움과 함께, 부엌에서도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던 여성이자 한 가정의 일원으로서의 작가의 삶도 더듬어볼 수 있습니다.


한편 호암미술관에서는 <덧없고 영원한 (The evanescent and Eternal)>이라는 제목으로 보다 다양한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국제갤러리 작품들을 포괄하는 말이 ‘관계’라면, 이곳을 한 단어로 말한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가족’, 특히 ‘아버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루이스 부르주아의 생애를 소개할 때마다 나오는 말이 트라우마입니다. 아버지는 가정교사와 불륜 관계를 맺었고,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으며, 그 속에 자란 자녀들은 흔히 말하는 문제아였던 가정. 그 속에 루이스 부르주아는 피해자였으나 결코 수동적인 위치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수학을 전공했던 그녀가 미술을 시작한 것도 어쩌면, 예술가들을 무시했다던 아버지에게 보란 듯이 대들기 위함이었을지도요. 그러나 그 일에는 시일이 걸렸습니다. 거의 불혹의 나이에 미술가가 되어 작품으로 말할 수 있었으니까요.

<호암미술관 전시 초반의 작품들. 신체 일부를 묶거나 절단하고 매다는 등 다소 과격한 작품들이 많다.>

전시 초반은 으스스한 느낌이 들 정도로 그로테스크하고 섬찟한 작품들이 꽤 있습니다. 그녀가 여성으로서, 어른 아닌 아버지의 그늘 아래 자란 자녀로서, 또한 사랑받고 싶은 딸로서 받은 고통을 날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성기, 혹은 성별을 상징하는 부위들이 잘리거나 묶인 형태들을 볼 수 있는데, 이런 것을 보기 힘들어하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고백을 직설적으로 듣는 것 같아 생생하게 기억에 남습니다.


<호암미술관 전시 중후반의 작품들. 작가 자신의 경험을 더 높은 차원의 이야기로 승화시킨 흔적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전시 전반을 두루 보고 나면 아무리 작품의 근원이 가족으로 인한 고통이라 해도 결국 그녀가 걷고자 한 길은 그 기억을 원망하는 길에 머물지 않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자 하는 길, 그리고 자신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그것이 평생을 살아갈 힘이 되지 않았을까요? 과거의 무엇에 얽매여 아파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꽃을 피우고 춤을 추는 사람이었음을, 특히 바느질 작품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과거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는 순간 맞이하는 것이 꼭 희망은 아니더라도, 혹은 제자리 같더라도, 어쨌든 자신에 대한 사랑이 있는 자리 말고 인간이 머물 수 있는 곳은 없으니까요. 과거를 사랑할 수 없다면, 오히려 더욱.


외면하면 두고두고 내 안에 퇴적되어 마침내 나를 잠식하는 순간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루이스 부르주아가 작품을 통해 그것을 평생을 말할 수밖에 없었던 건 살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자신만의 도구를 통해 되도록 사랑에 가까운 자리에서 그것에 대해 계속해서 말해보는 것은 부정적인 기억과 감정을 밀어내는 몇 안 되는 방법 중 하나니까요.

방식이 무엇이든 발화(發話)라는 건 이미 표현하고자 하는 것과 한 발 멀어져 어느 정도 거리 두기가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가족과 그들로 인한 두려움과 증오, 외로움과 일말의 연민을 말했던 그녀처럼 저도 계속해서 말하는 연습을 하는 중입니다. 그 도구가 목소리든, 글이든 어떤 방법으로든... 내가 나로 살기 위한 도구 한 가지 정도는 갖고 싶습니다. 지금은 그 도구가 바로 이런 글입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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