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을 보류하고서

<나 혼자 본다 19> 유화수, 경관보류 展

by per se

아트사이드갤러리

20251016- 20251115


나이가 들면 SNS 프로필 사진이 꽃으로 바뀐다는 말들을 합니다. 우스개소리로 넘어갔던 그 말을 실감하게 되는 것이, 여행 가면 집 앞에서도 봤던 꽃을 그렇게 찍고, 해마다 맞는 계절인데도 그 계절의 순간을 담기 위해 이리저리 쪼그려 앉아가며 자연을 사진에 담는 빈도가 점점 늘어갑니다.

물론 아무리 같은 계절이라 해도 매년 다르고 매 순간 다른 것이 자연의 모습이지만, 갈수록 이 자연이 소중해지는 것이 꼭 나의 나이듦 때문만은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제가 사는 서울이라는 이 좁은 도시에서 구석구석 일부러 해를 보는 공간과 초록을 심어두지 않으면 대부분 콘크리트 빛으로 살아가게 되고, 그나마 남은 자연의 공간들도 개발 논리에 밀려 빛을 잃어가는 것도 그 이유겠죠.

그러나 이것도 오래된 편견입니다. 기술은 우리를 위협하는 한편 구원하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선택과 방향의 문제일 뿐인지도 모르죠. 물론 그것도 하기 나름이라는 단순한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누가 얼마나 이득을 보느냐의 문제가 개입하는 이상, 기술의 ‘추구미’는 더욱 정의하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유화수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의 그 생소한 느낌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아름다우면서 처연하고, 따뜻하면서도 차가운 그 느낌을 뭐라 간단히 말하기 어려웠는데요. 2024년 송은아트센터에서 펼쳐진 송은미술대상 전시 중, 지하의 차가운 벽에 매달려 가느다란 가지를 파르르 떨던 그 미세한 진동의 감각이 여전히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죽어 있으나 한편 살아 있는 것.

가지를 처단한 그 칼이 다시 가지를 벽에 매달아

“살아 있으라” 명령한 느낌.

그러나 아랑곳 않고

기술이 영원히 가질 수 없을 기품과 생명을 자랑하는,

그 가지.

그 미술관 그 벽에 자리하게 되기까지의 가지의 내력과 그것이 여전히 살아 있게 하는 기술의 오묘한 조합을 보면서 인간과 자연과 기술이 공존하는 방식을 분명한 느낌은 아니더라도 단 번에 체감할 수 있었고, 동시에 사실상 기술과 접목된 작품은 어렵다는 편견을 지우지 못한 나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었던 기억입니다.

그 해 송은미술대상을 수상한 이 작가가, 개인전에서는 어떤 세계를 얼마나 더 보여줄지 궁금해서 서촌의 갤러리를 찾았습니다.


<재배의 몸짓> (2025)


갤러리에 들어서자마자 정면으로 만난 작품은 작년 처음 이 작가를 알게 해준 그 작품이었습니다. 작품 가까이로 다가서자 윙- 모터 도는 소리를 내며 인사하듯 가느다란 가지에 몸짓이 생깁니다. 장식적으로는 아름답지만 이 몸짓은 작년에 보았을 때도, 지금도 슬픈 데가 있습니다. 이 가지를 베었던 어떤 이유가 다시 몸짓을 갖게 된 이유라는 것 말이죠. 그럼 이 작품은 살아 있는 것일까요, 죽어 있는 것일까요? 다가갈 때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이 작품 곁에서 말을 건네 받고 답을 해야 합니다. 인간으로서의 답을. 피할 수 없는 가해자의 이름이거나, 혹은 이 나뭇가지와 다를 바 없는 자연의 일부로서의 답을 말이죠.


<조경사의 정원 #2> (2025)

<조경사의 정원>은 콘크리트 대신 돌 위에 나뭇가지가 붙어 있습니다. 콘크리트 벽 위의 작품보다는 훨씬 조화로운 조합이지만, 역시 인간의 논리로 떼어다 붙여지고 움직임이 가해진다는 점에서는 같은 결의 작품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조경사라는 말을 들으면 이 작품에 가해진 인간의 행위를 좀 더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베고, 떼어다 붙이고, 버리는지를. 사실 그것들을 인간의 행위에서 완전히 배제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제한적으로 살게 되는지요. 작가는 어쩌면 버려진 돌과 나무일지 모를 재료들로, 첫 인상이 아름다운 작품을 통해 많은 질문을 해보게 합니다.


<소나무, 소나무, 소나무> (2025)


지하로 가면 1층에서부터 상단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거대한 작품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스팔트와 나무 기둥이 교차하며 거대한 하나의 나무 형상을 한 작품인데, 아래를 보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천장에서 붙들고 있는 것이죠.

커다란 나무 기둥을 잇고 이어 커다란 나무가 되었지만, 바닥에 뿌리내리지 못한 나무는 얼마나 공허하고 아슬아슬한가요. 이렇게 보면 중간중간 자리한 아스팔트 덩어리는 마디를 잇는 매개각 아니라 마디를 잘라놓는 칼날이 됩니다. 이 역시 보기엔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들여다볼수록 서글픈 면이 있는 한 편의 시 같습니다.


<경관보류> 전시에 소개된 여러 작품들. 보기에는 아름다우나 처연한 면이 있다.

그 외에도 작가는 가로등 위에 전구 대신 가지를 놓거나, 가로등의 긴 봉을 나무로 제작해 자연히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가, 그렇다면 인간은 어디에 자리할 것인가를 생각해보게 합니다. 돌과 유리, 구슬, 아스팔트 등을 함께 놓은 작품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아름답다 생각하며 지나칠 수 있는 작품들의 재료를 들여다보면 ‘경관’을 ‘보류’하고 잠시 “이게 맞습니까”라는 질문을 듣게 됩니다.


요즘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지만 글을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AI의 글을 인간의 글이, 혹은 AI의 글을 인간의 글을 능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내 글이 부족하면 AI로 다듬었을 때 더 아름다워질까요? 혹은 아예 AI가 써준 글을 내가 다듬는 것이 차라리 나을까요? 이런 세상에 가슴에서 솟아난 천연의 마음을 직접 눌러 쓰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을까요? 원시성을 간직한 글이나마 내가 낫다고 말할 증거는 어디에 있을까요? 혹은 기술의 손길이 닿았더라도 아름다운 것이 제일일까요?

무엇이 우선인가, 어디까지 자연의 아름다움이라 해야하는가. 좀 더 들어내야할 것이 기술인가, 인간인가. 속을 다 내보이지 않는 이 작품들을 보며 자문해봅니다. 아마 앞으로 계속해서 더 많이 묻게될 질문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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