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6, 김둥지의 <좋은 파란색 찾기>에서.
좋은 파란색 찾기
20250306-20260404
WorksWorks
낯선 갤러리에서 그의 개인전이 열린다는 정보를 인스타를 통해 접했다. 그의 작품을 1회 개인전부터 빠짐 없이 보아오진 못했지만, 내가 보아온 개인전마다 그는 캔버스에 자신의 개인전 제목을 크게 적고 간단한 주제 표현(?)을 담아 작품의 대문처럼 내걸어왔다. 독특한 방식이다. 보통 제목을 짓는 일은 어려워하며 열심히 고민하지만, 쓰는 건 그냥 쓰고 지나갈 그 한 줄. 한 글자 한 글자씩 개인전의 제목을 칠하는 작가의 마음이란 어떨까.
제목도 재밌다. 좋은 파란색 찾기. ‘좋은’ 파란색이란 무엇일까. 내가 표현하고 싶은 주제를 돋보이게 해 줄 파란색일까, 혹은 보는 이들을 만족시킬 파란색일까. 이런 궁금함을 품고 보면 막상 파란색이 하나도 쓰이지 않은 듯한 작품들도 섞여 있다. 그런데 그는 왜 전시에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
궁금함을 뒤로하고 갤러리에 들어서니 그가 쌓아 올린 물감 냄새가 진하게 코 끝에 와닿는다. 단순한 풍경과 사물을 담은 캔버스들. 하늘, 새, 해, 산, 물고기, 사과, 게 같은 것들이 그려진 작품들을 보다 보면 그것의 의미나 작품으로 담은 동기를 궁금해하기보다, 몇 번인지 모를 붓질로 쌓아 올린 텍스처를 가까이 들여다보게 된다. 하나의 색으로 보였던 그 아래에 전혀 다른 색들이 보인다. 첫눈에 푸른색을 내기 위해 참 많은 색을 거쳐왔다 싶다. 다른 색들도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니 전시 제목에서 ‘좋은 파란색’보다는 ‘찾기’에 방점을 두고 만든 작품들로 읽힌다.
평범한 사물들이 정답고 친근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색조와 그 ‘붓터치’ 때문일 거다. <버섯> 그림을 보며 웃음이 터져 나왔는데, 그 작은 버섯에게는 다소 필요 이상으로 여백이 많아 보여서다. 그러나 그렇게 보이거나 말거나, 이 그림 속 버섯은 버섯인 채로 당당해서 귀엽다. “어차피 우주의 중심은 나, 버섯일 뿐.”이라 말하는 것 같다. 작가는 이 작고 귀여운 버섯의 색이라고 해서 달리 소홀하지 않았다.
게와 사과는 또 어떤가. 사람이 무수한 색의 마음과 성격을 갖고 있듯 이 사소한 생명체에도 여러 갈래의 마음이 있다는 듯, 거칠지만 단정하고 손길로 그만의 색들을 채운 것이 보인다.
이름을 짓듯 색을 지어주는 과정에서, 작가는 어떤 순간에 색을 찾았다고 느끼고 작업을 멈췄을까? 모든 붓질이 발자국이 되는 색을 찾는 여정 속에, 어느 순간에 붓질을 멈추고 ‘아 이제 되었다’고 생각했을까? 글이라면 아무리 열린 결말이라 해도 어느 정도의 기승전결과 구조를 갖추고 어느 때 매듭을 지어야 한다는 대략의 '마감선'이 있을 텐데, 미술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언제 완성이라 느낄지 모르겠다. 이런 점에서 미술 작가들은 글 작가들보다 자유로울까, 오히려 고통스러울까? 당연히 작가마다 다른 답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사실 그들도 잘 모를지도 모른다.
이래서 ‘찾기’라는 제목이 좋았다. ‘내가 찾은 파란색’이었다면 이런 질문을 해볼 기회가 없었을 거다. 작품이 아니라 제목으로 이런 의문을 갖게 된 것이 우습기도 하지만, ‘찾기’라는 여정으로 관람객을 초대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작품과 작가와 관람객의 간극을 좁히는 일이 좀처럼 쉽지 않은 요즘의 전시들 속에, 함께 그 과정을 따라가 볼 마음을 갖게 하는 일 말이다.
김둥지 작가의 인스타에는 새로 그린 작품들이 꽤 자주 올라온다. 전시된 것들이 소박하고 단순하지만 자세히 보면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들 위주라 하면, 전시되지 않은 작품들은 좀 더 날 것 같은 느낌이 많다. 붓 터치도, 구상의 추상화 정도도 거칠게 표현된 것들도 있다. 모두 매력 있다. 그는 작품의 가격도 가능하면 올리지 않는 편이라 한다. 단순한 겸손으로 읽히진 않는다. 그런 나름의 전략도 성장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저 자기 길을 걷는 것인지는 모른다. 다만 작가의 그런 마음이 누구도 알 수 없을 작가만의 과정으로 더 많은 관람객을 초대하는 동력이 될 거라 믿는다.
이번에도 그가 붓질을 멈추고 자기만의 완성에 도달해 전시에 내 건 작품을 만나는 순간, 나도 어떤 주체가 되었다. 붓으로 그린다는 회화의 본질에 집중하며 끝맺음의 순간에 대한 답을 ‘찾기’, 그리고 아름다움을 ‘발견하기’에 동참하는 주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