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계절을 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질문 7, <금상첨화>에서.

by per se

<금상첨화> 전

20260305-20260731

호림박물관 신사분관


며칠 전부터 길거리 마른 가지 끝에 노릇한 기운이 돌더니 산수유가 한창이고 개나리도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큰 일교차에 아침저녁으로는 잔뜩 움츠린 어깨가 좀처럼 펴지지 않지만, 그래도 낮에는 ‘이게 봄볕이구나’ 싶은 따뜻함이 스민다.

지나고 보면 이번 겨울은 그렇게 춥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마음의 냉기가 쉬이 가시지 않는다. 지난해 개인적으로 준비했던 일들이 많이 어그러져 수시로 낭패감을 맛보아야 했던 것이, 흘려보낸다고 했는데도 체기처럼 남아 가끔 속을 뒤집는다.

그럴 때는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가끔 아무 말없이 자기 폼을 뽐내는 전시가 제격이다. 작가의 세계나 숨겨진 의미를 찾아보기보다 그저 보고 즐기는 시간이 절실했다. 그러던 차에 눈에 든 전시가 바로 <금상첨화>였다.


말 그대로 금상첨화- 좋은 것에 좋은 것을 더한 전시장이다.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풍경에 하나씩 보기보다 먼저, 한 바퀴 산책하듯이 거닐어 보았다. 몇 걸음 걷지 않아도 잘 꾸며진 정원에 들어선 듯 형형색색의 꽃에 취하는 기분이다. 자연의 그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만들어진 풍경’인 것을 알면서도 아름다움을 만끽하기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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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담은 오래된 문집과 생활 소품들. 현대 작가의 조화 작품이 조금 이질적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어울려 있다.

첫자리에는 귀여운 개구리, 물고기 형태의 연적들이 놓여 꽃그늘 아래서 봄의 생동감을 더한다. 고려 후기 문신 이규보의 작품을 담은 <동국이상국집>도 보인다. ‘봄바람도 저물고 꽃 역시 가버릴 테니, 부디 꽃을 대하는 데 망설이지 마시길’이라는 문구를 강조해 놓았다. 계절이 돌아오면 또 필 꽃이지만, 그때의 꽃과 다음 계절의 꽃이 또 다르니 지금의 아름다움은 지금 만끽해야 옳다. 다만 이렇게 종이 위에 적은 시문으로, 혹은 청화백자로, 혹은 자수 작품들에 담은 봄은 이렇게 영원하게 피어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자개함과 여러 생활 소품들 속에도, 속속들이 봄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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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상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했던 <자수 공작 모란도 8폭 병풍>.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비단 위에 더해진 봄꽃> 섹션이다. 말 그대로 비단 위의 자수 작품들을 전시한 공간인데, 그 화려함과 정교함에 한참을 들여다보게 된다. 조상들이 이토록 정성을 기울여 봄을 수놓은 것은 단지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전시 소개문을 잠시 빌려 그 이유를 적어본다.


“자수 문양 중에서도 봄꽃이 움트는 모습은 새로운 시작과 풍요를 상징하며 오래전부터 사랑받아왔다. 봄꽃은 일상 소품을 비롯해 공간을 장식하는 병풍과 수장, 혼례복인 활옷과 혼수품 등 다양한 물품에 수놓아졌다. 그 안에는 사용자에게 봄꽃이 의미하는 풍요와 길상, 부귀영화가 함께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자수로 수 놓인 봄꽃은 계절의 정취를 일상 속에 간직하고자 했던 마음을 보여준다.”


이 많은 꽃들이, 누군가의 중요한 순간에도 아름다움이 깃들기를 마음에 새긴 꽃들이라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자수공작모란도 8폭 병풍’은, 검은 비단에 수놓아져 그 색조와 입체감이 더욱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광택이 도는 실을 빈틈없이 꿰어 결결이 떨어질 것 같은 꽃잎, 나풀나풀 공작새의 걸음에 따라 흔들릴 것 같은 화려한 날개, 그 사이사이의 음영이 실재하는 생명 그 이상으로 생동감 있다.


KakaoTalk_20260323_110521034_23.jpg 자수장 한상수 선생의 작품 <자수모란도 8폭 병풍>.

<자수모란도 8폭 병풍>은 모란꽃의 아름다움과 괴석으로 보이는 하단의 그림이 하나가 되어 모란꽃 본래의 쨍한 색감과 수수한 맵시보다 좀 더 웅장한 느낌을 준다. 자수장 한상수 선생의 작품이라는데, 그저 감탄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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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하는 아름다운 마음이 가득한 활옷.

창덕궁이 소장하고 있던 활옷을 복제해 제작한 <활옷> 작품은 또 어떤가. ‘꽃길만 걸으라’는 요즘식 축복이 앞뒤로 한 가득이다. 사실 이렇게, 여기 대부분의 작품을 보는 시간이 감탄만 연발하다 끝이 나고 말았다. 봄꽃이란 그렇지 않은가.


들어서기 전의 기분 때문인지, 전시를 감상하고 밖을 나서니 온 세상이 칙칙해 대조적이다. 여기에 황사와 미세먼지가 더해지는 봄의 절정에 이르면 사실 이런 작품 속의 꽃밭은 꿈에서나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실은 인생으로 치면 더하다. 인생에 이런 꽃이 피는 순간은, 봄처럼 주기적으로 찾아와 주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내가 기다리고 바라는 봄을 내게 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끔은 이런 아름다움을 의식적으로 내 곁에 두고 잠시 꿈과 환상 속에 젖어드는 것도 좋겠다. 가장 쉬운 방법이니까.

그러나 평소에는 이렇게 화려하지 않은 것들, 흔히 눈길 주지 않는 것들로부터 오는 봄을 찾는 연습을 해보려 한다. 내 것 아닌, 혹은 오지 않을 꿈속 봄에 내내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많은 것이 어긋나고 빗맞았던 지난 계절의 상처가, 그리 예쁘지는 않은 꽃일지라도 거기서 움틀 가능성을 떠올려본다. 갈라진 벽 틈에서 트는 형광 초록의 이끼 틈에서, 툭 잘라 담가 놓은 파뿌리에서 나름대로 억세게 뻗어가는 초록 파에서, 양념으로 물든 울긋불긋한 봄동에서도 내일이 자란다고 믿으며. 자연의 시계는 인간이 어쩔 수 없으니, 일상에서 피는 수수한 꽃을 시시 때때로 발견하는 수밖에 없다. 화려하지 않은 꽃도 꽃이다. 그리고 대체로 그런 꽃들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오래 피어 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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