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5, 최재은의 <약속>에서.
약속 (Where Beings Be)
20251223-20260405
서울시립미술관
가능하면 식물은 집에 들이지 않는 편이다. 꽃 선물이 들어오면 아름다움을 하루라도 더 간직하고 싶어서 애지중지, 매일 새 찬물에 담그고 절화 영양제를 물에 풀어가며 돌보기는 한다. 그러나 화분은 얘기가 다르다. 우리 집에는 화분에 담긴 식물을 쫓는 귀신이라도 있는지 들어오는 족족 죽어간다. 눈으로 예뻐는 하는데 물을 자주 주면 안 된다고 해서 조금 참다 보면 다 말라 있고, 그거보다는 자주 주어야지 하면 어딘가 썩어서 일어나지를 못한다. 가장 예민하지 않다는 식물을 검색해 들여도, 엄마가 ‘키워봐서 아는데 이건 절대 죽지 않는다’며 자신이 기르던 것을 내주어도, 틀림없이 우리 집에선 운명을 맞이한다.
부정적인 말을 종일 들려준 식물과, 애정을 담은 말을 들려준 식물의 말로가 다르다는 어떤 실험 결과를 본 뒤로, 차라리 ‘안 기르고 말지’라는 생각은 더 강해졌다. 매일 같은 모습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자라 있는 걸 발견하고, 계속해서 죽어가는 신호를 나에게 보내는데 그것도 모르고 지내는 내 모습들이 점점 불편해서였다.
솔직히는 인간의 손이 닿는 영역을 벗어나 사는 꽃들이 훨씬 행복해 보인다. 길가의 블록 사이를 과감히 뚫고 나와 오가는 이들의 발길에 차이면서도 꽃 한 번 환하게 피우고 지는 민들레나, 불길이 휩쓴 황량한 산속에서도 생명의 기지개를 켜는 나무 같은 것들이, 사는 게 만만치 않은지는 몰라도 나름의 멋을 화끈하게 뽐내 보는 운명이 낫지 않은가 싶은 거다. 애초에 그들의 아름다움이 인간에게 보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냥 식물은 식물답게 사는 것이 좋으니까.
그러나 이런 마음은 자칫 ‘관심을 두지 않는 것’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그래서 내 범주 안에 없는 것에도 관심을 갖고 ‘어떻게 존재하는지 알아야’ 그것을 보호하고 보존할 수 있다. 사람도 이해해야 그에 맞게 배려할 수 있는 것처럼.
간혹 식물과 대화한다는 사람이 나타나기도 하고, 식물이 내뿜는 기호를 에너지로 치환해 작품으로 만든 것을 본 적도 있지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인간은 그렇게 대화할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선 보아야 한다. 이름이 없다 생각했던 것들의 이름을 부르며 식물들을 구체적이고 개별적 존재로서 인식해야 한다. 그게 관심의 다른 말이니까. 꽃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던, 김춘수 시인의 말처럼.
그런 면에서 이번 최재은 작가의 <약속 (Where Beings Be)> 전시는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구호로 책임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보다 ‘자연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보는’ 행위를 우선시하는 점이 좋았다. 환경 파괴의 심각성에 초점을 둔 전시는 많이 보았지만, 자연을 있는 그대로 환기하는 전시는 (나에게는) 처음인 것 같다. 또한 시립미술관이라는 큰 공공의 장소 속에서 세계 속의 나와 자연을 인식하며 관람할 수 있었던 것도 좋은 포인트다.
'루시', '경종'(警鐘), '소우주', '미명'(微名), '자연국가'의 다섯 가지 소주제로 구성된 이 전시는 사실 해설이 없다면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많다.
치아 모양의 거대 모형 ‘루시’는 최초의 인류 루시에게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것이다. 아득히 먼 곳 언제 생성된 것인지 모를 돌을 가져다 벌집 모양으로 이어 붙인 것인데, 인간도 자연의 일부임을 하나의 조각으로 보여준다.
검푸른 바다 영상 위로 실시간 해수면 온도를 자막으로 띄운 <대답 없는 지평>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자연의 모습을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그 외에 <소우주>, <자연국가> 역시 시공간을 넘나들며 자연 고유의 영토성과 확장성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나를 공감각적으로 일깨운 작품은 <미명> 섹션에서 만난 작품들이다. 몇 점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압화 작품인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리고 머리 위로 선명하게 들려오는, 이름 없는 꽃들이라 생각했던 것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이름 부르기’. 이 압도적인 규모의 전시 섹션에서 자연스레 관람객은 자세를 낮추어 하나하나를 들여다보고, 가만히 인간의 입을 빌린 존재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 어떤 설명한 줄 없이도, 작가의 의도가 관람객에게 완벽히 스미는 순간이다.
그리고 발견한다. 암실 속에서 어둑한 인화지 위에 형상이 떠오르듯이, 지워졌던 혹은 보지 못했던 존재의 분명함을. 내가 지각하지 못한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니까... 그래 분명, 그들에게도 권리가 있다. 그들이 그들답게 살 권리가.
자연은 자신만의 속도를 가졌다. 그래서 사회가 복잡하고 빠르게 갈수록 그의 속도는 답답하게 느껴진다. 간혹 자연이 삽시간에 우리를 덮치는 사건을 맞이하고서야 그 압도적인 속도와 힘을 체감한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생명력이나 위력이 아니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자연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생각해보고, 알고 있을까. 여행 가서나 자연을 제대로 마주하고 보기 좋은 이미지로 소비하는 동안 우리는 그들의 권리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나. 우리, 아니 나 말이다. 우리도 자연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사실... 자연의 권리를 생각하는 것, 지금 이 시대에 가능한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