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본다> 6. 최종태: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대전시립미술관
20250715~20250831
‘성모자상 조각가’ 최종태 작가를 이야기할 때 종교적인 이야기를 빼놓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가 불교 관련 논문을 쓰기도 했고, 길상사의 관음보살상을 만들기도 했다는 것을 보면, 그의 종교에 대한 관심이 천주교에 국한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성당을 다녔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듯이 대단히 열정적인 신자는 아니었지만, 습관처럼 엄마를 따라 성당을 다녔고 성당에서 만난 친구들이 좋았으며, 성당에 다녀오다 시장에 들러 사먹는 간식이 좋았습니다. 방학마다 가는 캠프도, 가는 건 싫은데 막상 가서 보면 예상 못한 재미를 느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후 중고등학생이 되면서 부터는 성당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뜸해졌지만 그래도 힘들 때 외로울 때 마음으로 부르며 기도했던 이름이 하느님, 예수님이라서, 주로 그럴 때 나의 신을 찾았습니다. 시험을 잘 보게 해주세요, 원하는 대학에 가게 해주세요, 원하는 직업을 가질 수 있게 해주세요. 신은 내가 원했던 것이 100이라면 80은 이루며 살게 해 주신 것 같습니다. 가르침의 정확히 반대로 기도한 것 같은데 그것도 신의 뜻이었을까요.
하지만 그 뒤로 신의 뜻, 이라는 말을 가장 싫어하게 된 계기가 생겼습니다. 결혼 후 너무 예쁜 아이까지 낳으면서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을 때, 아이에게 자폐성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실 주변에서 판단을 유보하자며 저를 위로할 때도, 저는 분명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보통 아이들과 다르구나.
덤덤할 수는 없었지만 빨리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했습니다. 순례자가 따로 없다 싶을만큼 많은 치료실을 돌아다녔고, 아이에게 맞는 교육이 이뤄지는 교육기관을 알아보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뒤돌아보면 그 시간 동안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적도 많았지만, 신에게 이 아이를 돌봐 달라거나 (기능적으로) 좋아지게 해달라고 빈 적은 없었습니다. 힘든 순간보다는 평온하게 잠든 어느 날에야, 가만히 누워 생각할 때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이 정말 계시다면 그냥 한 날 한 시에, 혹은 아이보다 하루만 늦게 죽게 해달라 정도였죠. 돌아보면 신을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일상의 순간순간 신의 존재를 느낀 적도 알아챌 겨를도 없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서론이 길었지만 그래서 저에게 성모자상은, 눈물 버튼입니다. 가능하면 성당 근처에 가지 않았고 특히 성모자상은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일상적으로 아이를 십자가로 여기고 사는 내 마음을 스스로에게 들키는 것 같아 싫었고, 고통을 단지 주어졌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하다 말하는 것 같아 싫었습니다. 나는 성모 마리아도 아닌데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전시를 돌아다니다 우연히, 처음으로 최종태 작가의 성모자 상을 만났을 때. 차오르는 눈물을 꾹꾹 눌러 담았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보통의 성모자상에서 볼 수 없는 성모의 표정. 부드럽지만 언뜻 단호함도 엿보이는, 특정한 감정보다 경지를 알 수 없는 사유에 가까운 얼굴은 관음보살상처럼 보이기도 했죠. 그 순간을 잊지 못해서, 최종태 작가의 작품을 볼 수 있다면 기꺼이 전시장에 다녔습니다. 이상하죠. 성당의 그것은 그렇게 못 본다 했으면서, 갤러리에 있는 그의 작품은 볼 수 있었고 보고 싶었다는 것이. 아마 작품으로 만났기에 가능했나봅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성모자상뿐 아니라 다양한 소녀, 여성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각기 다른 표정이지만 일관된 톤이라는 것이 보입니다. 그것이 최종태 작가가 그리는 여성의 개성이겠죠. 저 중에 나도 있으려나 싶습니다. 성모자상이 좋아서 온 전시지만 나를 성모자상의 ‘어머니’에 가두지 않고 볼 수 있어서, 이런 작품들이 훨씬 더 좋았습니다. 겉핥기식이라도 작품을 감상하며 좋은 건 바로 이런 점이죠. 기대했던 것 말고, 의외의 것을 발견할 때, 내 삶에도 의외이며 예외적인 점이 하나 찍히는 느낌.
나는 그저 소녀이고, 여성이고, 한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내가 아들을 안고 있건 십자가를 지고 있건 별 상관이 없겠죠. 비장할 필요도, 책임감에 짓눌릴 필요도 없고요. 그냥 그렇게, 내가 나를 다른 굴레에서 탈출시켜 내 모습을 제대로 한 번 보고 싶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냥 아무 것 아닌 나를 바로 바라보면서 그제야 깨닫는 것이 있었습니다. '나는 나 밖에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구나, 그래서 신을 만나러 가는 발길을 끊었구나 '. 믿는다는 게 도대체 뭐길래, 신이 나를 저버렸다고 생각해서 믿거나 믿지 않기를 택한 걸까요.
이런 오만함을 깨달으니 동정이든, 연민이든, 장애 아이를 키운다는 이유로 나를 배려하고 위해주었던 주변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는 사실이, 동시에 떠오릅니다. 사실 이들이 모두 나의 신이 아니었을까요. 마리아도 예수도 한 가지 표정이 아니듯이 신의 얼굴도 여러 개라 믿습니다. 부족한 나여도 좋고, 내 사람들이 모두 시절 인연일 뿐이어도 좋습니다. 나에게 신은 어디에도 없으나 내 안에, 내 곁에 있습니다. 누군가 부정해도 할 수 없습니다. 이 믿음이 마지막이라서요.
이 전시 제목에는 카톨릭 영광송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중 아멘이 빠져있습니다. 아멘은 히브리어 'אָמֵן'(아멘)에서 유래한 단어로, '진실로', '확실히', '참으로'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종교적 맥락에서 기도의 끝맺음이나 성경 낭독 후 동의와 믿음을 표현하는 감탄사로 사용되는 말이죠.
제목을 이렇게 지은 것은 이 전시를 각자의 종교를 떠나 관람하기를 바라는 기획의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 믿음 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 말이죠.
확실한 건 아멘을 빼듯, 믿음을 완전히 상실한 자리에서도 발견되는 구원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전히 아멘을 부르짖을 수 없을 때 보이는 나만의 빛을, 소중하게 여기고 따라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게 제가 아는 몇 안되는 삶의 진실이라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