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본다> 7. 다니엘 아샴: 기억의 건축 展
페로탕 갤러리
20250710~20250816
비가 무척 많이 오던 날, 다니엘 아샴(Daniel Arsham)의 <기억의 건축> 전시를 찾았습니다. ‘상상의 고고학(Fictional Archaeology)’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활동한다는 다니엘 아샴의 작품은 전에도 본 적이 있었지만, 가장 최신작들 위주의 소규모 전시였습니다.
그의 작품은 지금이라는 과거의 미래에 서서 고대에 가까운 먼 과거를 바라보는 시점부터, 불현듯 찾아오는 몇몇 기억들까지 함께 바라보게 합니다. 미래에 발견되는 과거란 어떤 모습일까요? 내가 기억하는 과거의 원형과 언젠가 발견될 과거는 어떻게 다르고, 미래에 어떤 질문을 가져다줄까요? 만약 파괴된 모습의 과거라면 파괴된 부분은 어떻게 미래에 전달될까요? 다니엘 아샴의 작품은 이런 여러 질문을 품고 둘러보기 좋습니다.
전시장 1층의 작품들은 고대의 거대 조각상이 외딴 대자연 속에서 발견되는 순간을 포착합니다. 실제로 저런 풍경을 만난다면 고대에 어떻게 저런 곳에 저런 조각을 남겼을까 생각하겠지요. 그림 속 현재의 사람들은 관람객을 등진 채 모두 거대 조각을 바라보고 있어서, 내가 저 그림 속 사람이 되어 경이로운 광경을 목격하는 주인공이 되게 합니다.
2층에는 가장 최근작이라는 조각과 드로잉 작품들이 있습니다. 폐허가 된 과거의 유산 안으로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과거의 복장을 하고 있어 유산과 함께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 과거와 다르지 않은 현재 우리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저는 여기서, 여전히 과거를 소환하고 이리 둘러보고 저리 둘러보는 저 자신을 떠올렸습니다. 과거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저 자신이 과거를 헤집고 돌아보지만, 그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정말로 밖에서 잠긴 집과 같은 과거 안에서 한 발짝도 나올 수 없는 저 자신을요.
살다 보면 잊힌 것을 기억해 내기 위해 애쓸 때가 많지만, 미래의 언제든 난데없이 발견되는 과거도 있습니다. 이 전시를 보다 그런 순간을 맞았죠. 갑자기 생각난 초등학교 고학년 즈음의 어느 날이 불현듯 찾아왔습니다.
등줄기가 살짝 씩 젖던 어느 날, 등나무 아래에서 글짓기 시간을 가졌던 것을 보면 아마도 여름 초입이었나 봅니다. 선생님께서 마흔 살 즈음, 꿈을 이룬 자신의 하루 중 한 순간을 그림 그리듯이 써보라고 하셨습니다. 글쓰기에 가장 자신이 있었던 시절이라 꿈도 작가였던 저는 자신 있게 써 내려갔습니다. 쓴 글의 구체적인 워딩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이런 내용으로 적어냈습니다. 조금 오그라들지만 참고 몇 마디만 들어주세요.
“읽던 책을 덮는다. 커피 끓일 물을 올린다. 끓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커피를 타서 테이블에 앉는다. 테이블에 앉아 지는 저녁노을을 잠시 보다가 노트를 펴고 글을 적어 내려 간다. 작가로서 성공한 나의 여유로운 저녁이다.” 이런 식이었죠.
선생님은 곧 나와 아이들이 적은 글을 걷어가서 다음 날 잘 쓴 사람에게 상을 주었습니다. 제가 아닌 다른 아이가 상을 받았죠. 선생님은 아주 잘 쓴 글이라 칭찬하면서 그 친구의 글을 읽어주셨습니다. 제가 생각할 땐, 너무나도 별 것 없었습니다. 너무 별 것이 없어서 도대체 저건 왜 뽑아주셨을까 싶었죠. 그냥 어제 열심히 일하고 힘들어서 늦잠을 잔 뒤, 산더미 같은 치울 거리를 치우고, 잠깐 누웠다가 빨래를 삶는 등의 일이었죠. 이게 어떻게 꿈을 이룬 자신의 하루라는 걸까요? 선생님은 가타부타 설명이 없었고, 저는 어린 마음에 그 이유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너는 무슨 꿈이 그래? 혹시 넌 꿈이 없니?' 묻고 싶었지만 입을 꾹 다물었습니다. 물론 제가 상을 받지 못해서 그랬던 것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습니다.
선생님이 달리 깊은 뜻을 가지고 그 글에 상을 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와 돌아보니 어떤 일을 해내건, 못해내건, 그런 일상적인 일들은 우리를 떠나지 않고 지배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 아닐까 싶습니다. 인간답게 먹고살며 나름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하는 대부분의 활동이 꿈과는 관계없이 내 일상의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다 자라서야 깨달았죠. 나의 어렴풋한 패배감과는 관계없이, 나 역시 정확히 그 친구가 적었던 대로 살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물론 꿈에도 반 발짝쯤만 걸친 채로 살고 있고요.)
과거의 미래, 그러니까 현재에 와닿는 과거는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시기와 질투에 가득 차 인정할 수 없었던 친구의 글 속에 내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 이젠 이상하지도 억울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아니 어떻게 그때 그렇게 기가 막히게, 일상의 한 장면을 포착할 생각을 했지? 싶습니다. 아샴의 그림 속에서 과거를 발견한 현재의 인물들처럼, 과거 시점의 미래라고 해서 딱히 세련되거나 과거와 다르지 않다는 점과 비슷합니다.
갤러리를 나서며, 입구에 자리한 청동과 스틸이 교차하며 만든 비너스 상을 다시 봅니다. 내 몸은 반드시 과거의 일부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 시각화된 것만 같습니다. 앞서 다소 웅장하게 발견되는 과거와는 완전히 또 다른 모습입니다. 사랑과 미의 아이콘-그 안에서 끌어낸 과거와 미래 덕에, 비너스는 상상의 아이콘으로 재탄생합니다.
이렇듯 과거와 현재의 혼합물 같은 나도 언젠가는 미래에 발견될 유물이겠죠. 나는 과거 밖에 나와 현재를 살고 있는 모습일까요? 파괴되어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일부를 그리워하고 있을까요? 지금처럼 과거에 예상한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게, 조금은 체념 섞인 평범한 삶을 살고 있더라도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까요? <Stairs in the Labyrinth>라는 작품 속 작은 사람처럼, 마음속 깊은 곳에 각인된 과거를 향해 계단을 올라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