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시간이 흘러 아들은 둘이 되었고
하나는 다섯살, 하나는 세살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공주를 하나 더 잉태케 하셨으니 아내 뱃속에서 출산예정일 90여일을 앞두고 있다.
내나이 마흔, 참 혼란스러운 나이다.
아직 체감 현실인식은 20대 초반인데. 생리적 나이는 믿겨지지 않는 불혹이다.
부모님들은 이 나이때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그때로 돌아가면 IMF였겠지.
최근 드라마 태풍상사를 보다가 당시에 IMF로 나라가 기우는 와중에도 온몸으로 가족을 지켜낸 우리 엄마 아빠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
엄마 아빠. 위대한 이름이여. 도대체 어찌 그리 살아내셨오.
오늘은 아빠 이야기를 해야지.
아빠는 원래 농구선수였다.
대학때부터 선수를 그만두고 체육교사를 거쳐 지하철 기관사가 되셨다.
어릴때 살던 성북구 장위동.
농구하러 가는 아빠 따라서 광운대에 곧잘 가서 구경하곤 했다.
유치원때 인천으로 이사갔고
인천에서 초4까지 살다가
서울 목동으로 이사를 왔다.
그곳이 학군지인지도 몰랐다. 신기하게도 교과과정에 영어가 없었는데 같은반 친구들은 대부분 영어를 술술 했다. 친구네 집에 놀러가면 무려 cd를 넣고 돌리는 게임기가 있었다. 플레이스테이션을 처음봤다.
친구들집 냉장고는 문이 두개였고 먹을것이 가득했다.
부러웠다.
친구들 모두 목동아파트에 살때 나 혼자만 주택에 살았다. 빈부를 인지한 나이였다.
금값 목동아파트 건너편 주택지역에 어느 상가주택 구조의 우리집 아래 지하층에 오스칼이 있었는데 매일밤 ‘잔인한~ 여자라~ 나를 욕하지는 마~~~’ 소찬휘 티얼스를 부르는 노랫소리가 방바닥을 뚫고 올라와 자장가 삼아 잠이들었다. 술집 간판 네온사인이 방 창문에 비치는 로맨스도 있었지만 가끔 내 집 위치를 알고 오스칼이라 부르는 아이들도 있었다. 걔넨 친구는 아니었다. 확실히 친구들은 치부를 드러낸 별명을 부르진 않더라. 놀러오기도 많이 왔고 우리집에서 많이들 자고 갔다. (다들 잘 사냐)
아무튼 어느날인가 우리집에 양문형 월풀 냉장고가 생겼고 얼음도 나왔다. 아빠는 기죽지 말라고 플레이스테이션도 사줬다. 같이 용산가서 당시 30만원 플레이스테이션의 가격을 듣고 식은땀을 흘리던 아빠의 표정, 게임CD는 따로 사야한다는 말에 당황하는 아빠의 표정, 2인용 게임패드는 별도라는 말에 채념한듯한 아빠의 표정이 기억난다.
이왕 큰돈 주고 산지라, 나오는 길에 포장마차에서 아빠랑 왕 소세지 꼬치를 뽀드득 베어먹는데 아빠가 말했다. ”열심히 해라“
난 그날부로 게임을 정말 열심히 했다.
플레이스테이션이 생긴 뒤론 친구집에 가서 기웃거릴 필요도 없었다. 학교가 끝나면 다 오스칼 윗집으로 모이는 거다.
하루는 친구들 다같이 우리집에서 잤는데 다음날 아침 친구들 몽땅데리고 아빠가 농구 가르쳐준다고 공원에갔다. 확실한 기본기 교육부터 친구들 앞에서 덩크도 보여주고 아무튼 아빠는 친구들 사이에선 사기캐 히어로에 가까웠다. 그당시 아빠들은 대부분 운동 안하고 배나오고 드라마에 나오는 샐러리맨이나 뭐 그런 느낌이었으니까.
재미있는게, 대학교때 결핵에 걸렸을때, 아빠는 또 플스3를 사줬다. 덕분에, 투병생활하면서 게임만큼은 정말 열심히 했다. 아마 당시에 유튜브가 활성화 되었다면 더 열심히했을것 같다.
그런 아빠가 얼마전 전립선 암 확진을 받았다. 평생을 일만하시다가 은퇴 뒤에도 또 해남에 있는 요양원에서 계속 일만하고 지냈는데 아직 호강시켜드리지도 못했는데 암이라니. 아빠는 어떤 기분과 어떤 좌절감에 휩싸여있을지 감조차 오지 않는다.
결혼전에 같이 살때는 몰랐는데 오랜만에 볼때마다 아빠가 늙어가는게 보인다. 산 좋아해서 나를 국내 이것저곳 산이랑 산 다 업어서 데려가준 우리아빠 더 늙기전에 네팔 히말라야에도 보내드려야하는데...
아빠. 고마워. 사랑해. 미안해.
빨리 회복해서 히말라야 꼭 같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