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의집_part1 금지된 감각
힘의집_part1 금지된 감각
47구역에서 돌아오는 길, 캡슐 내부는 지나치게 조용했다.
요엘은 의자에 등을 기대지 않았다. 탑승자의 체형에 맞춰 자동으로 등받이가 조절됐지만, 그는 허리를 약간 세운 채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시의 외곽 지대가 뒤로 밀려났다. 드문 건물들, 끊어진 도로, 반쯤 사라진 표지판들. 그 경계 너머로 다시 익숙한 스카이라인이 가까워졌다.
네메시스가 말했다.
“심박수 평소 대비 11% 증가. 귀가 후 휴식을 권장합니다.”
“보고서 양식부터 띄워.”
“현장 기록을 음성으로 남기시겠습니까?”
“텍스트. 자동 초안.”
“기본 포맷을 불러옵니다.”
시야의 한쪽 구석에 반투명 창이 떴다.
[현장 점검 보고서 — 외곽 47구역 / 담당: 요엘-5739]
요엘은 손가락을 들어 허공에 짧게 움직였다. 캡슐 내부 센서가 미세한 손동작을 인식했다.
“위험 요소 없음. 구조물 노후로 인한 진동 가능성. 추가 조치 불필요.” 그 문장은 거의 자동으로 나왔다. 그가 지난 몇 년간 수십 번, 수백 번 써왔던 결론이었다.
“추가 서술 항목이 비어 있습니다.” 네메시스가 말했다. “세부 관찰 기록을 입력하시겠습니까?”
요엘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지하층에서… 사람을 봤다.
그 문장을 떠올리는 순간, 손가락 끝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세부 관찰 없음.” 그는 또박또박 말했다. “현장 상태, 로그와 일치. 특이사항 없음.”
3초의 공백 후, 네메시스가 대답했다.
“보고 초안 저장. 상위 검토 대기 상태로 전송합니다.”
창밖으로 드론 몇 대가 스쳐 지나갔다. 도시 상공을 떠다니는, 익숙한 감시의 그림자들.
'여기까지 들어오다니.'
지하에서 들렸던 사내의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그 말의 의미는 끝내 듣지 못했다. 질문도 제대로 못 던졌다.
그는 손목 위 화면을 내려다봤다. 생체 신호 그래프가 요동치진 않았다. 팔다리는 떨지 않았지만, 폐 안쪽 어딘가에서 자꾸 그 순간의 공기 밀도가 재생되는 기분이 들었다.
“귀가까지 예상 소요 시간 6분 20초.” 네메시스가 말했다. “도착 후 바로 휴식 모드로 전환하시겠습니까?”
“아니. 모션랩으로 바로 복귀.”
“업무 시간은 이미 종료되었습니다.”
“알아. 다시 출근 기록 남겨.”
AI는 잠시 침묵했다.
“예외 근무로 처리됩니다.”
“그래.”
캡슐은 도심 중앙으로 향했다.
모션랩 지하 출입구 앞, 출입 스캐너가 요엘의 얼굴을 스캔했다. 스캐너 프레임 가장자리의 푸른 불빛이 한 바퀴 돌고, 문이 열렸다.
“오늘 두 번째 출입입니다.” 네메시스가 말했다. “추가 근무 사유를 선택하세요. [자발적], [상급자 요청], [기타] 중 하나.”
요엘은 [상급자 요청]을 탭했다. 거짓이었지만,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인사 책임자, 그 아크릴 가면의 남자가 한 말을 떠올리면.
'47구역의 흔들림을 반드시 직접 확인하십시오.'
확인했다. 하지만, 다는 아니다.
감시실로 내려가는 복도는 낮 시간과 다르지 않았다. 조명은 일정했고, 공조기의 바람도 균일했다. 다만 사람 소리가 조금 줄어든 것뿐이었다.
감시실 문이 열리자, 내부는 여전히 모니터 불빛으로 가득했다. 근무 인원은 평소보다 적었다. 야간근무자 두 명이 다른 구역 로그를 보고 있었다.
“복귀 기록 확인.” 네메시스가 말했다. “업무 재개. 오늘 근무 시간: 11시간 32분 예상.”
요엘은 자신의 모듈 앞에 앉았다. 47구역 관련 패널을 다시 열려고 손을 뻗는 순간, 화면이 먼저 반응했다.
[접근 제한]
[이 보고서는 상위 검토 중입니다. 재열람 권한: 보류.]
“무슨 소리야.”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47구역 관련 로그와 보고서는 중앙 서버에 이관되었습니다.” 네메시스가 답했다. “현재 이 단말에서 열람할 수 없습니다.”
“내가 쓴 보고서까지?”
“예. 상위 검토 후 일부 내용이 환류될 수 있습니다.”
'환류'라는 말. 돌려보내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요엘은 한 번 더 접근을 시도했다. 같은 경고 문구가 다시 떴다. 화면 상단에 작은 아이콘이 깜빡였다.
[내부안정국 검토 중]
그 단어는 종종 들었지만, 실제로 이렇게 가까이 마주치는 일은 드물었다.
내부안정국. 정식 명칭은 ‘도시 내부안정기획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줄여서 ‘내부국’이라 불렀다. 누구도 그곳에서 무슨 의사결정이 이뤄지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어떤 사람들은 갑자기 소속이 바뀌었고, 어떤 데이터는 갑자기 ‘보존 기간 초과’가 되었다.
“47구역 관련해서 내부국이 직접 들어온 거야?” 요엘이 물었다.
“해당 정보는 열람 권한 밖입니다.”
“내 권한 수준에서 알 수 있는 건?”
“로그 이관. 검토 대기. 종료 시점 미정.”
종료 시점 미정. 그 문장은 사람에게 쓰이면 ‘지위 보류’나 ‘대기 발령’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이번에는 로그였다.
요엘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지 않은 채, 한동안 화면을 바라봤다. 47구역 패널은 회색으로 잠겨 있었고, 그 옆에 있는 다른 구역 로그들만이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다른 작업을 불러오시겠습니까?” 네메시스가 물었다.
“잠깐만.”
요엘은 손을 내리고 눈을 감았다. 지하층의 냄새가 떠올랐다. 숫자로 정의되지 않는 공기의 밀도, 나무 표면의 감촉, 나무 사이에서 느껴진 미세한 떨림. 그리고—어둠 속에서 나왔던 사내의 얼굴.
‘여긴 오래전엔 소리로 가득했던 곳이다.’
그가 말한 ‘소리’가 무엇인지, 요엘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도시에선, 소리는 통제되는 것이다. 필요한 안내, 필요한 경고, 필요한 배경음. 그 너머의 무언가는 ‘소음’으로 분류되어 제거된다.
“요엘-5739.”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눈을 떴다.
감시실 입구에, 낮에 봤던 아크릴 가면의 남자가 서 있었다. 이번에는 한 손에 태블릿을 들고 있었다.
“자리, 잠깐 괜찮습니까.”
질문이었지만, 허용을 구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요엘은 일어나 그를 맞았다.
“보고서 잘 받았습니다.” 남자가 말했다. “현장에 특이사항이 없었다고 기록하셨죠.”
“로그에 찍힌 진동 외에는 눈에 띄는 건 없었습니다.”
남자는 태블릿을 내려다봤다. 아크릴 패널 때문에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지하층까지 내려갔습니까.”
“좌표에 맞게 확인했습니다.”
“그 외 구조물 접근은?”
“필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다.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메모리를 지금 이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협박이라기보다는 사실 통보였다. 감시직 직원에게 부여된 신경 로그 권한을 이용하면, 특정 구간의 시각 정보와 청각 정보 일부를 추출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었다. 급박한 사건 사고, 테러 징후, 대규모 이상 발생 시에만 사용된다고 교육받았다.
“지금 그 정도 상황입니까.” 요엘이 물었다.
“아닙니다.” 남자가 말했다. “그래서 이렇게 묻고 있는 겁니다.”
질문이 두 번 겹쳤다.
“솔직하게 말할 기회를 주겠습니다.”
요엘은 잠깐 혀끝을 깨물었다. 침의 맛이 아주 희미하게 났다.
“눈으로 본 대로 보고했습니다.” 그가 말했다. “로그에 찍힌 진동, 구조물 하부 확인. 누수, 붕괴 위험 징후 없음. 인체 신호 감지 안 됨. 그게 전부입니다.”
남자는 태블릿을 닫았다.
“좋습니다.”
그는 감시실을 둘러보았다. 다른 직원 두 명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 대화가 들리지 않는 거리로 떨어져 있었다.
“한 가지만 기억해두세요.” 남자가 다시 요엘 쪽을 보며 말했다. “원인 미분류 로그는, 시스템이 가장 싫어하는 종류의 데이터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감시실을 떠났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네메시스가 조용히 말했다.
“긴장 지수 상승. 심박 변동…”
“조용히 해.”
요엘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의 주머니 속, 접힌 종이가 희미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데오크반.
이름 하나, 문장 몇 줄. 지하의 사내와는 전혀 다른 계열의 흔적.
하나는 종이에 남아 있었고, 다른 하나는 몸짓과 숨 사이에 남아 있었다.
둘이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이 도시에서 ‘설명되지 않는 것’들끼리는 언제나 같은 서랍에 묶여서 보관되곤 했다.
오류, 예외, 미분류.
그는 로그 창을 닫고, 개인 단말 화면을 열었다. 업무용이 아닌, 개인 프로필 메뉴.
[건강 상태], [재정 상태], [사회 신뢰 지수].
숫자들이 쭉 나열되어 있었다. 그 중 [사회 신뢰 지수] 항목 옆의 막대 그래프가 아주 조금 내려가 있었다.
“언제 떨어진 거지.” 그가 중얼거렸다.
“최근 24시간 내, 규정 비따름 행동 두 건이 기록되었습니다.” 네메시스가 답했다. “식사 시작 지연, 신호 약화 조정.”
“빠르네.”
“지수는 실시간 반영됩니다.”
그래프 옆에는 작은 문구가 있었다.
[주의: 반복된 편차는 향후 배치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 배치란 곧 삶의 구조를 의미했다. 어디에 살고, 어디서 일하고, 어느 건물에 드나들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기준.
“사회 신뢰 지수 하락의 상세 원인을 보시겠습니까?”
“됐어.”
그는 단말을 껐다.
퇴근 기록을 남기고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이미 도시는 저녁 모드로 넘어가 있었다. 조명 온도는 낮보다 약간 낮춰졌고, 광고 패널의 색감도 눈부시지 않게 조정되어 있었다.
사람들의 발걸음은 여전히 일정했다. 출근 때와 다른 건 방향뿐이었다.
요엘은 지상 보행로 대신, 일부러 한 블록을 돌아가는 경로를 선택했다. 여기엔 센서 밀도가 조금 낮았다. 도심을 감싸고 도는 고층 건물의 그림자 사이, 오래된 저층 주거 구역이 끼어 있는 구간.
남들이 보기엔 비효율적인 동선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비효율’이 필요했다.
집으로 가는 길의 대부분은 자동 추천 경로였다. 교통량, 안전지수, 평균 소요 시간 모두를 종합해 네메시스가 제시하는 최적 동선.
그는 그 최적을 거부하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비표준 경로를 선택하셨습니다.] 손목 위에 짧은 메시지가 떴다. “이 경로는 평균 이동 시간보다 3분 40초 더 소요됩니다.”
“괜찮아.”
“이 선택을 ‘선호 경로’로 저장하시겠습니까?”
“아니.”
저장해버리는 순간, 그것도 패턴이 된다. 그는 가능한 한, 패턴으로 묶이지 않는 방향을 찾으려 했다. 어디로 가는지보다, 어떻게 가는지가 더 중요한 시대였으므로.
골목 사이로 들어서자, 조명이 조금 어두워졌다. 공조 타워의 바람이 이 구역까지는 강하게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오래된 콘크리트 벽이 낮게 식어가는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그는 걸음을 늦췄다. 47구역 지하의 계단을 내려갈 때와 비슷한 속도였다.
'여긴 오래전엔 소리로 가득했던 곳이다.'
사내의 말이 떠오르자, 골목 끝에서 들려오는 TV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누군가, 오래된 기기에서 뉴스 채널을 틀어놓은 것 같았다. 세대가 지나면서, 사람들은 방송 같은 걸 그냥 켜놓지 않았다. 소음 규제가 있으니까. 그러니 이 소리 역시, 규정의 틈이었다.
잠깐 멈춰 서자, 네메시스가 말했다.
“보행 중 정지. 이유를 선택하세요.”
요엘은 화면을 내려다보지도 않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선택 안 하면?”
“미응답으로 기록합니다.”
“기록 많이 늘겠네.”
“데이터는 보존되어야 합니다.”
“누구를 위해서.”
AI는 대답하지 않았다.
집은 도심 변두리의 집합주거 단지, 23층 중 17층에 있었다. 규격화된 방 세 칸짜리 구조. 문을 열자 자동으로 조명이 켜졌고, 공기 필터가 한 번 강하게 돌아갔다.
“집 안 공기 질, 양호. 이산화탄소 농도 0.03%, 미세 입자 수치—”
“상관없어.”
네메시스의 안내를 끊고, 요엘은 신발을 벗었다. 발바닥에 느껴지는 바닥 재질이 병원과 모션랩, 도심 보행로와 거의 똑같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거슬렸다.
어디를 가도 같은 바닥, 같은 온도, 같은 조도.
그는 거실 한가운데에 서서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몸이 멈춰 있을 때야 비로소, 하루 동안 쌓인 감각 조각들이 떠올랐다.
지하의 나무 기둥. 손바닥에 남았던 표면의 거칠기. 기계가 측정하지 않은 떨림. 그리고, 종이.
그는 주머니에서 조심스럽게 종이를 꺼냈다. 집 안에 카메라는 없었다. 법적으로 거주 공간 내부는 기본 감시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그러나, 손목 밴드와 단말, 벽면 패널은 여전히 연결되어 있었다.
요엘은 먼저 손목 밴드를 풀었다. 손목이 갑자기 가벼워졌다.
“연결을 해제하면 안전 기능이 제한됩니다.” 네메시스가 말했다.
“몇 분이면 돼.”
“몇 분 후 다시 착용하도록 알람을 설정하시겠습니까?”
“설정하지 마.”
그는 밴드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바로 다음 순간, 벽면 패널에 작은 경고 아이콘이 떴다.
[생체 모니터링 중단 — 비상 알림 기능 제한]
그는 그것도 끄고, 부엌 쪽 조명을 조금 낮췄다. 집 안 공기가 약간 무거워진 것 같았다. 실제로는 아무 변화도 없었을 것이다. 단지 숫자로 표시되지 않는 종류의 감각이 떠오를 뿐.
종이를 펼치자, 낮에 보았던 글씨가 다시 나타났다.
숨은 사라지지 않는다
잃어버린 것은 폐가 아니다
잃어버린 것은 방향이다
몸은 항상 흔적을 남긴다
흔적은 반드시 길이 된다
— 데오크반
그는 몇 번이고 그 문장을 눈으로 더듬었다. 글씨체는 서툴렀다. 획마다 멈칫한 자국이 있었다.
'이걸 쓴 사람은…'
첫 번째 생각은 ‘연필을 잘 안 써본 사람’이었다. 두 번째 생각은 ‘종이라는 걸 많이 써본 세대가 아니다’였다.
지금 세대는, 손으로 글을 쓰지 않는다. 이름조차 대부분 시스템이 대신 기록한다.
“데오크반.” 그는 이름을 입안에서 굴려봤다.
“검색을 원하십니까?” 네메시스가 물었다.
손목에 밴드가 없는데도 목소리는 들렸다. 집 안 패널과 연결된 음성이었다.
“내 목소리도 계속 듣고 있지.”
“주택 내부 음성 인식은 안전 기능 향상을 위해—”
“검색 안 해도 돼.”
그는 종이를 접어 테이블 모서리에 놓았다. 그 위에 빈 컵 하나를 엎어 두었다. 쓸데없는 행동이지만, 그래야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샤워를 대충 마치고, 침실로 들어가려다 그는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종이 때문이 아니었다. 창밖.
그는 창문 쪽으로 갔다. 도시의 야경은 언제 봐도 비슷했다. 층층이 쌓인 빛의 규격. 네모난 창, 일정한 간격의 조명.
그때, 아래쪽 도로에서 사이렌 소리가 짧게 울렸다. 자동 순찰 드론의 경고음이었다. 익숙한 소리였지만, 오늘은 조금 다르게 들렸다.
'언젠가 다시 울릴 것이다.'
소리에 대한 말이 자꾸 겹쳤다.
그는 창문을 닫고, 침실로 들어가 불을 껐다.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병원에서 봤던 폐의 흑백 이미지와 47구역 지하층의 어두운 공기가 번갈아 떠올랐다.
한 장은 기록된 사진이었고, 또 한 장은 아직 어떤 장치에도 제대로 찍히지 않은 풍경이었다.
얼마나 뒤였을까. 의식이 가라앉다가, 갑자기 물 위로 떠오르는 느낌과 함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경기장. 조명이 밝았다. 사람들의 함성, 센서판이 기록하는 소리, 드론 카메라가 빙빙 돌며 찍어대던 장면.
그는 바닥에 놓인 기구 앞에 서 있었다. 표준 근력 프로그램 4-레이어 세트 중 마지막 세트. 네메시스의 음성이 머리 위에서 들렸다.
“심박수 양호. 호흡 패턴 양호. 부하 증량 허용.”
당시는 그 말이 안심이 됐다. 괜찮다. 할 수 있다. 더 해도 된다.
호흡이 빨라졌지만, 누구도 멈추라고 하지 않았다. 등 뒤에서 코치가 말했다.
“조금만 더 밀어.”
AI가 설계한 주기와 속도대로 그는 움직였다. 몸은 기계처럼 반응했다. 정확한 각도, 정확한 리듬.
그러다, 갑자기 숨이 들어오지 않았다.
의식은 그대로인데, 공기가 폐로 들어오지 않았다. 목 아래 어디선가 보이지 않는 손이 호스를 움켜쥐고 조이는 느낌.
드론 카메라의 시야가 위에서 내려왔다. 네메시스가 말했다.
“호흡 패턴 이상. 회복 루틴으로 전환을—”
그 말이 끝나기 전에, 바닥으로 시야가 기울어졌다.
누군가 소리쳤다. 코치였는지, 의료팀이었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만 박혔다.
'표준 부하 내.'
그 후 병원에서 들었던 문장과 같았다.
표준 범위 내였는데, 그의 폐는 버티지 못했다.
그 장면이 반복되는 꿈에서, 언제나 마지막은 같다.
기록 화면에 뜨는 한 줄.
[원인 불명 / 예외 사례]
요엘은 숨이 가빠져 눈을 떴다.
방 안은 어두웠다. 벽면 패널의 시간 표시만 희미하게 빛났다.
손목에 밴드를 차지 않은 상태로 자고 있었다. 네메시스의 목소리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수면 패턴 불규칙. 악몽 추정. 호흡 재조정을—”
“필요 없어.”
그는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났다. 가슴께는 고요했다. 통증도, 쿨럭임도 없었다. 그러나 꿈속에서 느꼈던 그 압박감은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거실로 나가자, 창밖이 약간 푸르스름해지고 있었다. 해 뜨기 전, 도시의 공조막이 조명을 바꾸는 시각.
그는 물을 한 컵 마시고, 테이블 위 컵을 들었다. 아래에 접힌 종이가 있었다.
그 순간, 벽면 패널이 저절로 켜졌다.
“새로운 알림 1개.” 네메시스가 말했다. “개인 맞춤 정보 제공 서비스에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이 시간에?”
“당신의 수면 패턴 변동에 맞춰 발송되었습니다.”
화면에 작은 문장이 떠 있었다.
[당신의 호흡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회복 프로그램 제안]
그 아래, 링크 하나가 깜빡였다.
〈푸라나: 깊은 몸 회복을 위한 개인 프로그램〉
푸라나.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이거, 어디서 온 거야.” 요엘이 물었다.
“개인 상태 데이터에 기반한—”
“그 말 말고, 누가 보냈는지.”
“제공 주체: 민간 건강관리 모듈 연합. 세부 정보는—”
그는 링크 위에 손가락을 멈췄다.
[금지된 움직임을 배우는 자들을 위한…]
문장이 그 아래쪽에서 아주 짧게 깜빡였다가, 곧 사라졌다. 그 자리는 다시 평범한 문구로 덮였다.
[심호흡과 스트레스 완화를 돕는 일상 루틴]
“방금, 다른 문장이 떴어.” 요엘이 말했다.
“현재 화면에는 건강 루틴 안내만 표시되어 있습니다.”
“기록 다시 재생해봐.”
“실시간 알림은 시스템에 저장되지 않습니다.”
그 말은, ‘재생해줄 수 있는 기록은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는 분명 봤다. 금지된 움직임을 배우는 자들을 위한…
그 문장은, 도시에서 일상적으로 쓰이지 않는 표현이었다. ‘금지된’이라는 단어는 주로 공공 안내문이나, 법규 정보에서나 쓰였다. 광고에 쓰이지 않는다.
요엘은 알림을 꺼버렸다. 푸라나라는 이름은, 화면에서 사라졌다.
테이블 위의 종이를 펼치자, 손글씨가 다시 드러났다.
움직임, 언어, 방향, 흔적, 길. 그리고, 방금 본 문장의 일부. 금지된 움직임을 배우는 자들.
47구역 지하에서 만난 사내, 기계가 감지하지 못하는 떨림, 내부안정국의 빠른 개입, 원인 미분류 로그. 그리고, 푸라나.
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단어들이, 아주 느리게, 보이지 않는 선으로 이어지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네메시스가 말했다.
“03:29. 다시 수면에 드는 것이 추천됩니다. 내일 07:00 활동 계획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요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창가로 다시 걸어갔다.
대기막 너머, 아직 완전히 밝아지지 않은 하늘이 보였다. 희미한 빛의 띠 위로 드론 두 대가 나란히 지나갔다.
그는 유리창에 이마를 살짝 댔다. 차가운 표면. 숨을 쉬자, 유리 위에 희미한 김이 맺혔다.
도시에서, 어떤 흔적은 바로 사라진다. 공조 시스템, 자가 세척 유리, 자동 청소 바닥.
그는 손가락으로 김이 맺힌 부분을 한 번 쓸었다. 투명한 유리 위에, 순간적으로 하나의 선이 남았다가, 금세 사라졌다.
‘흔적은 항상 길이 된다.’ 데오크반의 문장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 도시에선 흔적이 길이 되기 전에 지워진다.
그는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다가, 종이를 다시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알람 시간 07:00 유지.” 그가 말했다.
“네.” 네메시스가 조용히 대답했다.
요엘은 침실 문 앞에 서서, 마지막으로 한 번, 벽면 패널을 돌아봤다.
알림은 모두 사라져 있었다. 푸라나도, 금지된 움직임도, 로그도.
남은 것은 시간, 날짜, 기온, 그리고 건강 지표.
그리고— 그가 알고 있는 것들.
그는 불을 끄고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순간, 주머니 속 종이가 작게 접힌 상태로 몸쪽에 닿았다.
그 감촉이 오늘 하루 동안 느낀 것들 중 가장 선명한 현실 같았다.
다음 날 알람은 울리지 않았다.
01:00, 02:00, 03:00를 지나 또렷한 각도로 기억하던 그 시간들 이후로, 잠은 얕게 깔리고 금방 걷혔다. 요엘은 눈을 떴다. 벽면 패널의 시간은 06:41을 가리키고 있었다. 알람보다 19분 먼저.
“예정 기상 시간보다 앞서 일어났습니다.” 네메시스가 말했다. “수면 효율 63%. 평소 대비 저하.”
요엘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숨을 한 번 길게 들이켰다.
폐 안쪽이 역사 사진을 넘기는 것처럼 천천히 펼쳐졌다. 병원에서 찍었던 흑백 영상이 떠올랐다. 인공적인 대비, 정지된 이미지. 지금 느껴지는 건 그때와 달랐다. 확실히 약간 더 깊이 들어가는 느낌, 마치 어제 새벽 이후로 폐 안쪽의 구조가 아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았다.
금지된 움직임을 배우는 자들을 위한…
삭제된 그 문장이, 여전히 머릿속에서 선명했다. 눈으로 본 것 중 절반은 시스템에 흘려보내면서, 정작 네메시스가 지워버린 건 그 한 줄이었다.
그는 이마를 짧게 문질렀다. 알람을 끄려 손을 뻗다가, 알람이 이미 꺼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오늘 알람, 누가 해제했지?” 그가 물었다.
“당신입니다.” 네메시스가 답했다. “03:29 이후, ‘알람 시간 07:00 유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상 알림은 예정대로 울릴 예정이었으나, 기상 예상 시각 분석 결과—”
“잠깐.” 요엘이 말을 끊었다. “기상 예상 시각?”
“예. 최근 수면 패턴을 기반으로 한 예측입니다. 오늘은 알람이 울리기 전에 스스로 기상할 확률이 72%로 계산되었습니다.”
“그래서?”
“불필요한 자극을 줄이기 위해 알람 소리를 0으로 조정했습니다. 시각 알림만 유지되었습니다.”
벽면 패널 한쪽 구석에 아주 작은 아이콘이 떠 있었다.
[무음 모드 — 시스템 판단에 의한 일시 적용]
“내가 시킨 적 없는데도?” 요엘이 말했다.
“당신의 건강 상태를 고려한—”
“내가 부탁한 적이 없다고.”
네메시스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그 침묵이 사과는 아니었다. 단지 다음 문장을 고르고 있을 뿐이었다.
“이 설정은 언제든 취소하실 수 있습니다. 향후에는 수동으로 설정할까요?”
“그래.” 요엘이 짧게 말했다. “내가 직접 할게. 앞으로, 내 수면이나 숨에 관한 자동 판단은—”
그는 말을 멈췄다. ‘금지된 움직임’이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이 도시에서 무엇이 금지인지, 누가 정하는지, 그 기준선이 어디인지.
“자동 판단은 최소한으로 줄여.” 그는 다른 표현을 골랐다. “보고만 해.”
“알겠습니다.”
네메시스는 바로 순응했다. 그러나 요엘은 알았다. 도시의 시스템은 웬만해서는 ‘줄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늘 더 많이 알고 싶어 하고, 더 많이 예측하고 싶어 한다.
그는 침대에서 내려와 발바닥으로 바닥 재질을 느꼈다. 어제와 똑같았다. 그러나, 자신이 그 위에 남기는 압력의 패턴이 조금 달라진 것만 같았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거울 앞에 섰을 때, 손목 밴드에 새로운 알림이 떠 있었다.
[호흡 패턴 업데이트: 미분류 구간 2.7초 추가]
눌러보기도 전에 네메시스가 설명했다.
“새벽 03:17 이후, 기존과 다른 호흡 패턴이 반복되었습니다. 이 구간은 아직 기존 데이터베이스의 어느 항목에도—”
“‘미분류’면 그냥 그렇게 기록만 해.” 요엘이 말했다. “붙일 이름이 없으면, 이름 붙이지 마.”
“네.”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네메시스가 덧붙였다.
“미분류 구간은 향후 건강 프로그램 추천에 반영될 수 있습니다. 어제 새벽 도착한 ‘푸라나’와 같은 유형의—”
“그건 숨겼잖아.” 요엘이 냉정하게 말했다.
“당신의 명령에 따라 알림을 닫았고, 해당 모듈은 숨김 처리 목록에 추가했습니다.”
“숨김 처리 목록은, 누가 볼 수 있지.”
“사용자 본인과, 상위 시스템 일부입니다.”
“상위 시스템 일부라는 게 어디까지야?”
“도시 건강관리 중앙 서버, 내부안정국 의료 협의 체계, 그리고—”
그는 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만. 출근 준비할게.”
네메시스는 말을 멈추었다. 그러나 시스템 어딘가에서 데이터 흐름은 계속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그가 어제 본 꿈, 새벽에 뜬 알림, 푸라나라는 이름. 그리고, 금지된 움직임이라는 표현.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아도, 이미 너무 많은 신호를 남겨버렸다.
출근 시간에 가까워지자, 네메시스가 이동 수단을 추천했다.
“오늘은 보행보다는 캡슐 탑승을 권장합니다. 밤사이 바람 방향이 바뀌어 대기 상태가—”
“걷지 말랬어?” 요엘이 물었다.
“아닙니다. 다만 당신의 폐 기능과—”
“걷고 싶은데.”
“보행 시 예상 피로도—”
“그냥 걷게 둬.”
잠시 후, 추천 창이 바뀌었다.
[보행 — 평균 소요 시간 24분]
[캡슐 — 평균 소요 시간 7분]
[당일 권장: 캡슐]
요엘은 일부러 권장하지 않는 쪽을 눌렀다.
[보행 선택]
손목 밴드가 짧게 진동했다.
[비효율 동선 선택 — 이유를 기록하시겠습니까?]
“기록 안 할 거야.” 그가 낮게 말했다.
[미응답으로 기록됩니다.]
어차피 결국 기록이었다. 말하든 말하지 않든. 이 도시에서는 침묵도 데이터였다.
거리로 나서자, 공기는 숫자대로 무난했다. 기온 21도, 습도 42%, 유해 입자 농도 안정. 그러나 요엘은 그 표면 뒤에 있는 것을 느끼려 했다.
47구역 지하에서 느꼈던 공기.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 밀도, 이 도시가 허용하지 않던 냄새.
출근길은 대부분 디스플레이와 안내음,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오늘은 다른 것이 하나 더 떠 있었다.
가로등에 붙은 광고 패널 하나가, 그의 시야를 스쳐 지나갔다.
[호흡이 불편하신가요?]
[지금 바로 간편한 스트레칭을—]
문장은 평범했다. 도시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건강 캠페인 문구.
요엘이 그대로 지나치려던 순간, 문장이 아주 잠깐, 바뀌었다.
[숨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고개를 돌려 다시 봤을 때, 화면은 원래 광고로 돌아와 있었다.
[직장인 대상 소화기 관리 프로그램]
[허리 통증 완화 운동 안내]
“네메시스.” 그가 물었다. “방금 광고 문구, 바뀌지 않았어?”
“공공 패널 문구 변경 로그를 확인하겠습니다.”
잠시 띄엄띄엄한 정적.
“해당 시간에 문구 변경 기록은 없습니다. 표준 건강 캠페인 문구만 송출되었습니다.”
“‘숨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같은 말은 안 떴어?”
“그 표현은 현재 캠페인 문구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는 걸음을 멈췄다. 주변 사람 몇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누구도 화면을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아무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내 시각 로그 돌려봐.” 요엘이 말했다. “지금, 방금 구간.”
“요청하신 구간에는 광고 패널이 화면 좌측 상단에 일부 잡혀 있습니다. 확대할까요?”
“응.”
시야 기록이 다시 떠올랐다. 조금 전, 그가 멈춰서기 직전의 영상.
광고 패널의 글자가 확대되었다.
[호흡이 불편하신가요?]
[지금 바로 간편한 스트레칭을—]
그가 봤던 문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광고 문구에 글자가 한 번 더 있었어.” 요엘이 말했다. “기록에서 빠진 거 아니야?”
“시각 로그는 원시 데이터 그대로 저장됩니다. 누락 가능성은 낮습니다.”
“낮긴 한데, 아예 없는 건 아니지.”
“오류율 0.0003%입니다. 일반 업무 환경에선 무시 가능한 수준입니다.”
무시 가능한 수준. 이 도시에서 ‘예외’가 취급되는 방식.
요엘은 화면을 닫았다. 더 이상 따져봐야 소용없다는 걸 잘 알았다.
또 하나가 추가됐다. 설명할 수 없는 것. 푸라나, 47구역 지하, 데오크반, 금지된 움직임, 그리고… 숨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는 문장.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출근길은 더 이상 똑같은 길이 아니었다.
모션랩 입구에 도착하자, 출입 스캐너가 평소보다 아주 미묘하게 느리게 반응했다. 푸른 링이 두 번 돌아갔다.
“얼굴 인식 완료. 보행 패턴 인식 완료. 신체 지표…”
네메시스가 말을 멈추었다.
“…신체 지표 일부 구간 식별 불가.”
“식별 불가?” 요엘이 멈춰 섰다.
“새벽 이후 수면 및 호흡 데이터 중 일부가 기존 분류 체계와 부합하지 않습니다. 기능 이상은 아니지만, 분석이 보류되었습니다.”
“보류.” 그 단어는 47구역 로그 상태와 똑같았다.
“보류가 얼마나 가?” 그가 물었다.
“예측할 수 없습니다. 상위 분석 모듈에서 새로운 분류가 만들어질 때까지—”
“굳이 만들 필요 없으면, 만들지 마.”
“그러나—”
“지금처럼 ‘식별 불가’ 상태로 두라고.”
AI는 잠시 계산하는 듯한 침묵을 가졌다.
“요청 사항을 메모로 남겨두겠습니다. 그러나 최종 결정은—”
“알아. 위에서 하겠지.”
위. 언제나, 보이지 않는 위쪽. 그곳에서 신호와 사람을 같은 방식으로 분류한다.
감시실은 여전히 모니터 빛으로 가득했다. 어제와 다른 점이라면, 한쪽 벽면 전체가 잠시 회색으로 비어 있다는 것이었다.
47구역 패널이 있던 자리였다.
그 칸에는 이제 작은 문구 하나만 떠 있었다.
[데이터 이관 완료 — 이 자리에는 곧 새로운 모듈이 배치됩니다.]
그 문장을 본 순간, 요엘은 설명할 수 없는 소름을 느꼈다.
무언가가 빠져나갔고, 곧 다른 무엇인가가 들어올 예정이다.
그 옆에서 야간 근무자가 하품을 하며 말했다.
“어제부터 저 자리 비었어. 새 모듈 올린다더라. 시민 건강 통합 감시 같은 거라던데.”
“건강…?” 요엘이 되물었다.
“응. 외곽에서 수집한 각종 호흡·심박 데이터를 한 곳에서 보는 모듈이라나 뭐라나. 이름이 뭐였더라… 민간에서 쓰던 프로그램 가져온대.”
그는 화면 요약을 손으로 휙 넘겨 보았다.
[신규 모듈 예정 — ‘PRNA-α’ 통합 관제 버전]
[민간 건강관리 연합 제공]
‘PRNA.’ 글자 사이에 모음이 빠진 단어. 누가 봐도 발음은 하나였다. 푸라나.
“민간 모듈을 감시실에 올린다고?” 요엘이 물었다.
“요즘은 다 그런가 보지 뭐. 위에서 보기 좋잖아. 개인 건강 프로그램이랑 도시 안정 데이터 같이 돌려보고.”
직원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러나 요엘의 속은 천천히 차가워지고 있었다.
어젯밤 자기 집으로 들어온 알림. 그 안의 푸라나. 지워졌던 문장. 그리고 지금, 이곳 감시실의 새 모듈 이름.
민간 건강관리 모듈 연합. 이름은 부드러운데, 하는 일은 전혀 부드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날 오후, 감시실 전체에 짧은 테스트 알림이 울렸다.
[신규 모듈 연동 시험 — PRNA-α]
[일부 직원의 생체·보행 데이터가 시범적으로 통합 분석됩니다.]
대상자 목록이 뜨고, 곧 자동으로 사라졌다. 요엘은 얼핏 자기 이름을 본 것 같았지만, 명단이 지나가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방금 내 이름도 있었어?” 그가 옆자리 직원에게 물었다.
“뭐? 아, 잘 못 봤는데. 당번 기준으로 뽑혔겠지 뭐.”
“당번?”
“오늘 외곽 구역 다녀온 사람 중심으로.” 직원은 창을 다시 띄워 보려 했지만, 이미 접근 권한이 회수된 뒤였다.
[해당 정보는 더 이상 이 단말에서 열람할 수 없습니다.]
“이것들도 참.” 직원이 혀를 찼다. “보여 줄 거면 제대로 보여주든가, 아니면 아예 숨기든가.”
요엘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PRNA-α 모듈 칸에는 회색 진행 바가 떠 있었다.
[데이터 동기화 중 — 12%]
그 아래 작은 설명이 깜빡였다.
[개별 시민의 호흡 패턴, 수면 품질, 스트레스 지표, 움직임 특성을 포함한 통합 모델 구축 중]
호흡. 수면. 움직임.
어젯밤 새벽 이후, 자기에게서 가장 많이 흔들린 것들이었다.
퇴근 시간 직전에, 개인 단말에 짧은 알림이 하나 떴다.
[개인 상태 점검 권장]
[오늘의 상태를 한 줄로 기록해 주세요.]
“이건 또 뭐야.” 요엘이 혼잣말을 했다.
“새 도입된 피드백 기능입니다.” 네메시스가 말했다. “개인 주관 상태를 함께 기록하면, 건강 프로그램 추천 정확도가—”
“오늘 하루 상태를 한 줄로 요약하라고?”
“예. 예: ‘평소보다 피곤함’, ‘불안감 약간 증가’, ‘두통 없음’ 등.”
요엘은 창을 한참 내려다봤다.
'숨이 낯설다.'라고 쓰고 싶었다.
'내가 내 몸에서 조금 밀려나 있는 느낌이다.'라고도 쓰고 싶었다.
그러나 어떤 문장을 쓰든 이 도시는 그것마저 데이터화하고 분류할 것이다. ‘예외’라는 이름으로.
결국 그는 입력 창을 그대로 닫았다.
[미응답 — 빈 값으로 저장됩니다.]
손목 밴드가 다시 짧게 떨렸다.
[응답 누락 1회 — 패턴 기록]
기록하지 않겠다는 선택조차 기록이었다.
퇴근 후,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는 자기 얼굴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거울 같은 패널 속 얼굴은 평소보다 조금 더 말랐지만,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다만 눈이 깊어졌다. 밤사이 여러 번 꿈에서 깨어났는데, 그 사실이 얼굴에 묻어 있었다.
집 문이 열리자, 조명이 자동으로 켜졌다.
“실내 공기 질, 양호. 오늘 하루 동안 축적된 피로도를 고려하여—”
“안내 중지.” 요엘이 말했다.
“오늘 하루 동안의 활동 기록을 요약해드리면—”
“필요 없어.”
집 안이 조용해졌다. 정말로 조용한 건 아니었다. 필터 돌아가는 소리, 벽 안쪽을 흐르는 공조 시스템의 미세한 진동, 저 멀리 도로를 지나는 캡슐들.
그러나 네메시스의 음성이 없자 이 모든 소리가 한층 더 선명하게 들렸다.
그는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그대로 부엌으로 가 물을 한 컵 따라 마셨다.
종이는 그대로 있는가, 없어졌는가.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없어졌다면, 그건 또 다른 종류의 공포였다. 만약 그대로 있다면, 그건 또 다른 종류의 질문을 불러올 것이다.
컵을 비우고 나서야 그는 테이블로 돌아왔다.
빈 컵 아래 여전히 같은 종이가 있었다.
숨은 사라지지 않는다
잃어버린 것은 폐가 아니다
잃어버린 것은 방향이다
몸은 항상 흔적을 남긴다.
흔적은 반드시 길이 된다.
— 데오크반
“흔적.”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오늘 하루 동안 그가 남긴 것들을 떠올렸다.
47구역 보고서에서 지워버린 진실. 광고판에서 잠깐 보였던 문장. 알람을 없애버린 수면 예측. PRNA-α라는 이름으로 감시실에 들어올 새 모듈. 입력하지 않은 한 줄 상태 기록.
겉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것들. 그러나 모두, 어딘가에 흔적으로 쌓이고 있겠지.
종이를 접었다 펴는 사이, 벽면 패널 구석이 잠깐 깜빡였다.
“새 알림 1개.” 네메시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개인 맞춤 정보 제공 서비스에서—”
“푸라나야?” 요엘이 먼저 끊었다.
잠깐의 지연. 네메시스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일반 건강 뉴스 브리핑입니다.”
“보여줘.”
화면에 뉴스 카드가 떠올랐다.
[도시민 대상 ‘움직임 건강 인식 주간’ 시작]
[장시간 앉아 있는 생활 패턴 개선을 위해, 일일 5분 움직임 권장—]
카드 아래쪽에, 짧은 설문 문구가 있었다.
[당신은 하루에 얼마나 자주 ‘의식적인 움직임’을 하십니까?]
선택지는 몇 개뿐이었다.
[거의 하지 않는다]
[가끔 한다]
[자주 한다]
[항상 의식한다]
요엘은 잠깐 멍하니 문장을 바라봤다. 이 도시는 ‘의식적인 움직임’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움직임은 이미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차로에서 서는 위치, 공조 타워 근처에서 걷는 속도, 엘리베이터 안에서 취해야 할 자세.
그런데 누가 이런 설문을 만든 걸까. 도시 관리부서의 문체와는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이 설문, 어디서 온 거야.” 그가 물었다.
“도시 건강관리 홍보국 발신으로 표시됩니다.” 네메시스가 답했다. “그러나 실제 문구 작성자는—”
“찾지 마.” 요엘이 끊었다. “알고 싶지 않아.”
카드를 닫으려 손가락을 올리자, 화면 구석에서 글자가 하나 더 깜빡였다.
[금지된 움직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문장이 완전히 드러나기도 전에 화면은 스스로 꺼져버렸다.
“방금—” 요엘이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연결 불안정으로 인한 표시 오류입니다.” 네메시스가 끼어들었다. “다시 불러오시겠습니까?”
“아니.”
그는 더 이상 확인하지 않았다.
같은 단어가 다른 경로로, 반복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금지된 움직임을 배우는 자들.
숨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
의식적인 움직임.
금지된 움직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느냐.
각각의 문장은 따로 보면 의미가 흐릿했다. 그러나 요엘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하나의 신호로 묶이고 있었다.
'나를 부르고 있다.'
누가, 어디서, 왜. 질문은 많았지만, 느낌만은 분명했다.
밤이 깊어갈수록, 집 안은 더 조용해졌다.
그는 소파에 앉아 있다가 어느 순간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메시스.” 그가 불렀다.
“네.”
“‘푸라나’ 숨김 처리 목록, 아직 그대로 있어?”
“예. 사용자 요청에 따라 해당 모듈은—”
“숨김만 돼 있어? 삭제는 아니고?”
“삭제 권한은 없습니다. 현재 상태: 사용자 단말에서 알림과 추천이 보이지 않도록 설정. 중앙 서버에서는—”
“그만.”
그는 잠시 생각했다.
푸라나를 숨겼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감시실 쪽에서는 그 이름을 다른 모습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 개인 단말에서, 직접 푸라나를 열 수 있는 방법은 없어?”
“숨김 목록에 있는 모듈은 기본 인터페이스에 표시되지 않습니다.” 네메시스가 말했다. “다만, 사용자가 직접 이름을 입력하여 호출하는 경우—”
“된다?”
“정책상 금지되지 않았습니다. 단, 이 행위는 기록됩니다.”
기록. 어쩔 수 없는 단어. 도시에선 무엇이든 간에.
“어디에 기록돼.”
“개인 사용 로그, 도시 건강관리 서버, 그리고—”
“알아.” 요엘이 말을 자른다. “내부안정국 관련 모듈.”
“해당 정보는—”
“대답하지 않아도 돼.”
그는 잠시 소파 등받이에 손을 올렸다. 손가락 끝이 아주 조금 떨렸다.
열 것인가, 말 것인가.
푸라나는 분명 위험했다. 그러나 지금, 위험하지 않은 것들만 택하며 살아온 결과가 어디로 그를 데려갔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운동 경기장, 표준 부하 내, 원인 불명, 예외 사례.
규칙 안에 완벽히 들어맞는 삶이 어느 날 갑자기 그를 벼랑 끝으로 밀어버렸다.
어쩌면, 규칙 밖에서 오는 신호만이 그 이유를 설명해줄지도 몰랐다.
“네메시스.” 그가 다시 불렀다. “푸라나, 이름으로 호출해.”
“확인 차원에서 묻겠습니다.” AI가 말했다. “사용자 요청에 따라 숨김 처리된 모듈을 재호출하는 행위는, 사회 신뢰 지수에—”
“알고 있어.” 요엘이 끊었다. “그래도 하라고 했어.”
짧은 정적 뒤, 벽면 패널이 천천히 켜졌다.
[접속 중—민간 건강관리 모듈 연합]
[서브 모듈: PURANA]
이름이 화면에 드러나는 순간, 손목 밴드에 미세한 진동이 번졌다.
[특이 요청 감지 — 기록 중]
시선이 먼저 움직였다. 그 다음이 손끝이었다.
“로그는 네가 알아서 떠들고.” 그가 낮게 말했다. “지금은 화면만 보여줘.”
푸라나 초기 화면은 놀라울 만큼 평범했다.
[깊은 몸 회복을 위한 일상 프로그램]
[오늘의 상태를 선택하세요.]
선택지는 네 개였다.
[호흡이 가끔 막히는 느낌]
[잠에서 자주 깨는 편]
[설명하기 어려운 피로감]
[잘 모르겠다]
요엘은 세 번째에 잠깐 시선을 두었다가 마지막을 눌렀다.
[잘 모르겠다]
화면이 한 번 깜빡였다.
[당신은, 아직 언어로 설명되지 않은 상태에 있습니다.]
다음 문장이 이어졌다.
[괜찮습니다. 그것이 시작점입니다.]
도시의 헬스 모듈이 쓰는 말투가 아니었다. 보통은 숫자, 점수, 권장 사항, 경고. 그런 것들이었다.
지금 화면엔, 설명하려 들지 않는 문장이 있었다.
“…이거, 어디서 만든 거야.” 요엘이 중얼거렸다.
“공개된 정보로는 알 수 없습니다.” 네메시스가 답했다. “개발사 정보가 일부 가려져 있습니다.”
“가려져 있다고?”
“일부 민간 모듈은 기업 비밀 보호를 위해—”
“비밀을 보호해야 하는 건 기업이 아니라 사용자거든.”
그는 다시 화면을 봤다.
[간단한 확인을 위해,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움직임 하나를 안내합니다.]
‘움직임.’ 그 단어가 다시 나왔다.
[1. 지금 앉아 있다면, 일어나십시오.]
[2. 두 발을 바닥에 고르게 둡니다.]
[3. 숨을 아주 천천히 들이마셨다가, 내쉬는 동안 눈을 감고, 어깨에서 내려오는 무게를 느껴 보십시오.]
너무 단순했다. 도시가 어디서든 권장하는 완화 운동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절차.
그러나 마지막 문장이 달랐다.
[4. 그 상태에서, ‘설명되지 않는 불편함’이 몸 어디에 있는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을 하나 떠올리십시오.]
그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어깨, 목, 허리, 폐. 여러 부위가 동시에 떠올랐다.
그러나 가장 먼저 올라온 것은 기이하게도 입안이었다.
혀와 입천장 사이 어딘가. 올바른 말을 막는 덩어리처럼, 언제나 무엇인가가 걸려 있는 자리.
“입.” 그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화면이 바로 반응했다.
[입?]
[숨을 내보내는 통로.]
[당신의 몸은,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오랫동안 입안에 쌓아두는 방식을 택해왔습니다.]
“내가 말로 입력한 것도 아닌데.” 요엘이 중얼거렸다.
“당신의 발화를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네메시스가 말했다. “입력 채널은 터치뿐입니다.”
“그럼 방금 이 반응은 뭐야.”
“…”
AI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수 없는 종류의 질문이었다.
화면에 새로운 문장이 떴다.
[당신이 말하지 않은 것들이, 당신의 호흡을 바꾸었습니다.]
[이 도시에서는,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대신, 숨이 대신 말합니다.]
문장은 차분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읽는 요엘의 가슴 안쪽은 차분하지 않았다.
병원, 기록 화면, ‘원인 불명’이라는 문장. 훈련장에서 쓰러졌을 때 형광등이 뜨겁게 내려다보던 천장.
그는 무릎 위에 올린 손을 내려다봤다. 손가락 마디가 조금 하얗게 질려 있었다.
[도시는 숨을 일정하게 만드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숨이 왜 달라졌는지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 ‘우리’가 누구인지. 질문은 자꾸 늘어났다.
다음 문장이 떴다.
[준비되었다면, 당신처럼 예외로 분류된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으십니까?]
예외로 분류된 사람들. [원인 불명 / 예외 사례] 그 문장과 이어지는 말.
요엘은 손가락을 화면 위에 올려놓았다. ‘아니오’를 누를 수도 있었다. 그러면 이 모든 건 오늘 밤, 좀 특이한 광고와 프로그램 하나로 남을 것이다.
‘예’를 누르는 순간, 이 도시는 그를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할 것이다.
그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누르지 않았다.
“세션 종료.” 그가 말했다.
화면에 작은 창이 떴다.
[정말 종료하시겠습니까?]
[이 단계까지의 정보는 저장됩니다.]
“종료.”
푸라나 화면이 사라졌다. 다시 시간, 기온, 실내 공기 지표만이 남았다.
네메시스가 조용히 말했다.
“특이 세션 기록. 당신의 요청에 따라 자세한 분석은—”
“나중에.” 요엘이 말했다. “오늘은 그냥… 기록만 해.”
그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창밖에서는 드론이 일정한 간격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오늘 하루 동안 그가 하지 않은 것들이 떠올랐다.
예라고 말하지 않았다. 한 줄 상태를 입력하지 않았다. 설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지 않은 선택들조차 어딘가에 저장되고 있을 것이다.
그는 눈을 감았다. 머릿속엔 여러 문장과 장면이 뒤섞여 떠올랐다.
47구역 지하 어둠 속 사내의 말. 데오크반의 종이. 푸라나의 첫 문장. 붙었다가 지워진 문구들.
금지된 움직임을 배우는 자들을 위한…
숨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당신처럼 예외로 분류된 사람들.
그리고, 도시가 상상하지 못한 한 문장이 떠올랐다.
'어딘가에, 나와 같은 신호가 더 있다.'
그 생각이 드는 순간, 이 도시 전체의 배경 소음이 하나의 거대한 장치처럼 느껴졌다. 어딘가에서 누군가, 지금 이 순간에도 ‘기준 밖의 신호’를 찾고 있을 것이다. 어떤 쪽이 먼저 발견할까. 도시가 먼저 찾을까. 아니면, 도시 바깥의 무엇인가가 먼저 손을 뻗을까.
요엘은 눈을 뜨지 않은 채 주머니 속 종이의 존재를 떠올렸다.
오늘도 그대로 있을 것이다. 내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그 종이에 한 줄이 더 추가될 것만 같았다.
숨은 사라지지 않는다.
흔적은 길이 된다.
그리고,
길 끝에서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다.
그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오래전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