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너던 하이트<불안세대>

편안함을 좇다가 불편해질 세대

by 감나무감

"한 때 나는 단어들의 바다를 탐구하는 스쿠버 다이버였다. 하지만 이제 나는 제트 스키를 탄 남자처럼 수면 위에서 질주한다. "

읽자마자 머리에 딩~하고 종이 울렸던 문장.

내가 그랬다. 외국 소설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이유는 아무리 훌륭한 작가의 작품이라도, 단순히 우리말로 언어를 번역해 놓은 문장들은 탐구할 만한 바다의 깊이를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박완서나 박경리 작가의 작품을 읽다보면 느끼는, 깊숙이 들어오는 한 줄기 햇빛으로 다채롭게 빛나는 바다 속에서 형형색색의 열대어를 만나는 기쁨이 없다고나 할까.

​하지만 <불안 세대>에서는 디지털 기기의 폐해를 지적하며, 사람들이 더 이상 단어의 탐구에 몰입하지 않는 이유는 작가나 작품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더 이상 글자를 읽지 않고 (쳐다)보기 시작했다는 것.

<불안 세대>의 대부분 내용은 현실에서는 과잉 보호를 하지만, 온라인 상태에는 아이들을 무방비로 방치하고 있는 어른들에 대한 비판과 이로 인해 불안에 잠식되어 있는 아이들의 문제점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나는 위의 문장에 꽂혔다. 불안한 세대도 문제지만 우리는 더 이상 바다 속에서 진주나 전복을 채취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 그저 수면 위를 잽싸게 훑고 지날 뿐이라는 현실 인식에 공감이 간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내용.

플랫폼에서의 삶은 젊은이를 항상 자신이 선택한 사진과 영상, 댓글, 이모티콘의 사회적 결과를 미리 생각하면서 자신의 브랜드 관리자가 되도록 강요한다. 각각의 행동은 반드시 '그 자체를 위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모든 공개적 행동은 어느 정도 전략적이다. 그레이의 표현을 빌리면,그것은 활동 자체와 분명히 구별된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행동이다.

​인터넷 상의 놀이가 현실 공간에서의 자유 놀이가 아닌, 분명한 목적 의식을 지닌 행동임을 설명하는 문장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인생>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바람이 불 때 흩어지는 꽃잎을 줍는 아이들은 그 꽃잎을 모아둘 생각을 하지 않는다.
꽃잎을 줍는 순간을 즐기고, 그 순간에 만족하면 그뿐.

​SNS에 올릴 사진을 찍기 위해

꽃잎을 줍고, 모으는 우리는

꽃잎을 줍는 순간의 즐거움은 이미 다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