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단 한 번의 삶>

삶은 일회용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일회향(享)은 어때요?

by 감나무감

김영하의 소설을 몰아서 읽었던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 한 번 꽂히면 그 작가의 책을 다 읽어보는 편.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검은 꽃 등등 <김영하>로 도서관에서 검색해 통으로 몇 권을 빌려놓고 읽었던 기억이 있다. 막힘없이 술술 읽혔고, 분명 재미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읽고 나서는 '그래서 뭘 말하는 거지?' 라는 의문이 들었었다. 딱히 남는 게...


그래도 '여행의 이유'라는 에세이는 좋았다. 물론 어느 지점이 좋았었는지 사실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단 한 번의 삶'은 김영하가 작년에 낸 에세이다.

책을 읽고 내용을 정리하기 위해 책상에 앉은 지금도 사실 '그래서 뭘 말하는 걸까?' 라는 의문이 든다. 읽을 때는 고개를 끄덕끄덕하기도, 간간히 혼자 웃기도 했는데 말이다. 인상적인 부분을 몇 부분을 정리해 본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어서 환대보다 적대를, 다정함보다 공격성을 더 오래 마음에 두고 기억한다. 어떤 환대는 무뚝뚝하고, 어떤 적대는 상냥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게 환대였는지 적대였는지 누구나 알게 된다. (p,29)


요새는 '긁힌다, 긁다'라고 표현하던데. 웃으며 상대를 '긁'은 적은 없는지 돌아보게 된다. 상대에게 남겨지는 것은 나의 웃음 뒤에 감춰진 날카로운 발톱일테니.


바르트는 텍스트가 저자의 손을 떠나는 순간, 어떤 의미에서 더 이상 저자와 관계가 없다. 왜나하면 텍스트는 독자에 의해 무한히 재생산, 재창조될 대상이다. 텍스트에서 저자는 명목상의 저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텍스트에서 오독이란 무의미한 말이다. 라고 설파한 적이 있다. 더 나아가 그는 독자를 텍스트로 유희하며 새로운 텍스트를 생산하는, 다시 말해 텍스트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는 존재라고 보았다. p.94


아. 그렇구나. 책을 읽으며 메모해 두었던 부분을 지금 옮겨적다보니, 김영하의 소설이나 에세이가 읽고 나서 허전한 이유를 알겠다. 독자가 재생산, 재창조할 부분을 남겨두었기 때문은 아닐지 ( 너무 많이 남겨둔 건 아닐까? ^^:)


돌아보면 나라는 존재가 저지른 일, 풍기는 냄새, 보이는모습은 타인을 통해서만 비로소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천 개의 강에 비친 천 개의 달처럼, 나라고 하는 것은 수많은 타인의 마음에 비친 감각들의 총합이었고, 스스로에 대해 안다고 믿었던 많은 것들은 말 그대로 믿음에 불과했다. (p.102)


천 개의 강에 천 개의 달이 뜬다는 표현. 이런 문장을 접하게 될 때, 책을 읽는 희열을 느낀다. 내 주변의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나라는 달은 어떤 형태와 빛으로 보여지고 있을까. 하지만! 존재론적 의미에서 보면 달은 여전히 하나 아닐까? 천 개의 강에 어떤 모습으로 뜰지를 고민하기 보다, 오롯이 우주에 하나로 존재하는 달로서의 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지켜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궤도를 이탈한 자, 여러 번 이탈을 꿈꾸고 이탈을 실행한 김영하의 인생을 살짝 엿보게 하는 에세이이다. 알뜰신잡에 나와 고품격 지적 수다를 다른 패널들과 나누는 김영하에게도 교양인, 교양있는 상태가 되기 위한 그만의 몸부림이 있었다는 것을 솔직하게 알려주어 작가를 인간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에세이였다.


인생은 일회용으로 주어진다. 그처럼 귀중한 것이 단 하나만 주어진다는 사실에서 오는 불쾌는 쉽게 처리하기 어렵다.(p.9)

솔직히 이 에세이를 펼쳤을 때, 작가의 [일회용 인생]이라는 표현에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었다. 삶은 우리가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누리고 가는 것 아닐까? 내가 작가라면 "인생은 일회향(누릴 享)으로 주어진다." 라고 썼을 텐데. 일회용이라 하니 우리 인생이 나무젓가락같이 느껴져 씁쓸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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