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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니스 Oct 21. 2019

유통기한 있는 인연들

어떻게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형성할지, 나는 아직도 배우고 있다.

‘헤이, 어떻게 지내?’ 작년 9월, 프랑스 니스에서 면접을 볼 때 만났던 친구한테 페이스북으로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비행도 있었고, 피곤하다 보니 어쩌다 2일 후에 답장을 했다. ‘안녕! 비행 다녀와서 이제야 답장해. 비행한 지 어느 정도 돼가는데, 이제야 적응되는 거 같네.’ 그 친구는 금방 메시지를 읽었다. 그 후로 한 달. 지금까지 여전히 답이 없다. 메시지 창을 열어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뭔지 살펴보니, 친구가 다른 면접에 도전했지만 떨어져서 내가 위로해주는 내용이었다. ‘힘내! 너도 알다시피 운이 많이 작용하잖아. 나도 얼마 전에 파이널에서 떨어진 이후로 계속 떨어지고 있어.’ 그 후에 내가 합격을 하고 비행을 시작했으니, 이 친구는 나의 근황을 몰랐을 거다. 여전히 답장이 없는 걸로 보아, 여태 겪었던 다른 스쳐 지나간 인연들처럼 그저 내가 ‘합격했는지 안 했는지’ 궁금했던 게 아닐까.








이 친구뿐만이 아니다. 키에브에서 만난 친구도 몇 달 후에 메시지로 ‘합격했니?’ 묻곤, 원하는 답변을 듣고 거기서 메시지는 끝이 났다. 스토커 같은 친구도 있었다. 입사 전까지 런던에 있으면서 카페일을 했는데, 우연찮게 승무원 준비를 하는 친구를 만났다. 내가 일을 그만두고도 꾸준히 안부를 물으면서(정말 형식적으로), 항상 마지막에는 ‘입사했니?’를 묻더라. 진절머리가 나서 나중엔 아예 메시지를 안 읽었다. 한 달, 두 달 이렇게 지나고서도 물귀신처럼 보내더라. ‘왜 메시지 안 읽니? 나한테 뭐 화난 거 있어?’ 그러던 어느 날, 우연찮게 이 친구가 내 인스타그램을 알아내 팔로우를 했다. 그 후론, 아무런 연락이 없다. 인스타그램에서 간접적으로나마 내가 입사를 하고 비행을 다니는 흔적을 봤기 때문이다.



다 크고 나서 사람을 사귀고 관계를 발전시키는 과정은, 모래사장에서 보석을 발견하려는 노력과 비슷한 것 같다. 이게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살펴봐야 한다. 이렇게 꼭 자기가 필요한 정보만 얻으려는 사람들이 있더라. 물론, 그 사람들이 그런 불순한(?) 목적으로 내게 연락을 하기 전엔, 나는 그 친구들과 나름의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니스에서 면접에 떨어지고, 시내를 구경하던 도중 이 친구와 마주쳤다. 나름 같이 면접을 본 ‘정’이 있기에 연락처도 주고받고 사진도 찍었다. 내가 그 친구를 위로해 준 것처럼, 종종 안부를 물으며 서로를 격려했다. 이렇게 형성된 유대감은, 마지막엔 결국 내가 입사를 했다는 소식과 함께 마침표를 찍게 되더라. 한두 번이 아니다. 



한 달 동안 유럽에서 면접을 보러 다니며, 수많은 인연들을 스쳐 지나갔다. 같은 꿈을 가지고 도전하는 그 간절함과 열정은 우리만 알 수 있는 것이기에, 면접에서 떨어진 서로를 격려하고 앞으로의 도전을 응원해줬다. 그 마음은 정말 뜨거웠기에, 꺼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헤어질 땐 항상 ‘꼭 연락하자! 우리 도하에서 보자!’로 끝을 맺었다. 하지만, 각자 서로 다른 위치와 장소에서 저마다의 일로 바빴던 탓인지, 다시 만나자던 마지막 인사말은 여전히 추억 속에서만 맴돌고 있다. 우리의 목표는 어쨌든 승무원 취업이었고, 잠재적인 경쟁자였기 때문 아닐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거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지난 취업 준비 2년 동안 나는 언젠가는 잊혀갈 유통기한 있는 인연들을 많이 만났던 것 같다. 승무원 준비는 대게 스터디 모임을 꾸려서 면접 연습을 한다. 우리의 목표는 단 하나, ‘취업’이다. 그래서 당연히 사적인 교류 같은 건 없다. 그저 정해진 시간에 만나 연습하고 헤어진다. 어쩌다 마음 맞는 사람들을 만나도, 서로가 왠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차피 나중에 안 볼 사이인데.’ 그렇게 많은 인연을 스쳐 보냈다.



누군가에겐 이런 이야기가 당연할 수 있다. ‘스쳐 지나가는 게 인연이지.’ 하지만 내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나는 결코 ‘혼자 살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와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감정과 마음을 공유할 사람이 필요하다. 어쩌면 욕심이 많은 탓일 수도 있다. 이미 내겐 그런 친구들이 있지만, 나는 여전히 새로운 사람을 찾아 마음을 나누고 싶다. 하지만, 그런 인간관계를 나이가 들어 만들기엔 체면 차릴 일이 많다. 먼저 다가가기 낯부끄럽고, 혹시나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는 게 아닌지 걱정된다.



가끔, 중동에 정착한 다른 친구들과도 이야기를 나누면 저마다 적어도 한 번쯤은 그런 경험이 있다. 생전 연락이 없다, 어디서 입사했다는 소식은 귀신같이 들어서 연락이 오더란다. 염치없이 준비할 때 참고했던 자료를 부탁하는 경우도 있단다. 물론, 그 사람과 어느 정도 유대감이 있었는지, 어떤 상황에서 그렇게 대화가 오고 갔는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낯짝이 참 두껍네’라고 생각이 드는 경우다.



아쉬운 인연들도 많다. 카카오톡 친구 목록은, 그동안 그렇게 스쳐 지나간 인연들의 총체적 집합체다. 감사하게도, 함께 울고 웃던 인연들이 지금은 대부분 비행을 하고 있다. 프로필에 유니폼을 입은 사진을 보면, ‘아, 이분도 결국 됐구나!’ 뭔가 모를 감동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안부가 끊긴 지 오래됐기에, 어느 날 뜬금없이 메시지를 보내기도 애매하다. 그저, 한때 같이 준비하던 사람들이 프로필 사진 속에서 유니폼을 입고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며 ‘잘 지내겠지’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관계에 대한 고민은 평생 내가 풀어야 할 숙제고, 성장하는 과정인 것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나이 들어가고 환경이 바뀌지만 여전히 같은 고민을 한다. 비행을 시작하고 나서, 관계에 대한 고민은 깊어져 갔다. 매 비행마다 새로운 크루와 비행을 한다. 한번 비행을 하면 다시 마주치기 힘들다. 그래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것 대신 ‘베이비’, ‘마담’, 혹은 ‘언니’로 부른다. 외국인 동료가 나를 ‘언니!’하고 부를 때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한국인이 많고, 한국인을 좋게 봐줘서인지 한국말을 아는 크루들이 많다. 아무튼, 서로의 이름 한번 불러보지 않고 비행을 마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일회성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깊은 관계에 대한 갈망이 커졌고, 어떻게 하면 여기서도 인연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이 되더라.



그렇기에, 지금까지 안부를 묻는 친구들이 참 소중하다 느낀다. 먼저 주기적으로 연락해 주는 친구들은 참 고맙다. 국내 항공사를 준비하면서 만난 스터디원들은 종종 함께 식사하는 자리를 만든다. 7명 중, 두 명만 승무원이 됐다. 그래도,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가 서로를 응원하며 따뜻한 밥 한 끼 같이 먹는다. 준비생 시절, 정보 공유하는 단톡 방에서 인연이 닿아 런던에서 만난 옆동네 승무원 친구도 있다. 한국에서, 영국에서 승무원 준비를 하고 입사를 기다리는 동안, 한결같이 응원해주던 친구들도 여전히 따뜻한 안부인사를 건네준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는 말처럼, 비행 횟수가 한 달 두 달 늘어날수록 차츰차츰 나의 새로운 인연들이 나타났다. 같이 비행을 하다 연락처를 주고받고, 종종 휴무에 밥 한 끼, 커피 한 잔 하는 친구들도 생겼다. 물론, 그 과정에서 상처도 있었다. 내가 그 사람을 생각하는 정도와 상대방이 나를 생각하는 정도가 다를 때 오는 상처 말이다. 그럴 땐, 훌훌 털어버리고 나와 맞는 인연을 찾아 나서는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는 걸 배웠다. 슬퍼하지 않고 말이다. 아무리 황량한 사막일 지라도, 오아시스는 곳곳에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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