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여정의 발단, 웨이코와 크리스찬

6년 만에 다시 돌아온 볼리비아

오늘 40만원을 썼다. 텍사스 휴스턴에서 웨이코로 우버를 타고 이동하는 왕복 비용이다. 우버에 이렇게 거금을 써본 것은 처음이다.


결론적으로 올해 최고 잘한 소비라고 생각한다.


볼리비아로 돌아가는 길에 텍사스를 경유했다. 교환학생 당시 머물렀던 베일러대에 가기 위해서다. 이곳에서 나는 세상을 처음 배웠다. 물론 지금도 배우는 여정 속에 있겠지만.


당시 교환학생을 신청했던 것은 순전히 성과지향적인 삶에 매몰된 탓이었다. 대학 2학년 당시 학내 방송국을 하면서 하루에 4시간씩 자는 강행군을 매일 반복했다. 보도부장과 생중계팀장이라는 보직을 동시에 맡아야 했기 때문이다. 씻지도 않고 학교에서 자는 날이 많아지면서 나는 그 학기 학업을 지속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몸에서 이상신호들이 오고 있었다. 휴학을 했다. 그런데 휴학을 하면서 아무것도 이루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남들이 다 하는 교환학생을 지원했다. 그리고 학점에 맞춰 듣도 보도 못했던 학교에 배정받았다.


2015년 9월 나는 기독교 기반의 학교였던 텍사스 웨이코에 위치한 베일러대에 갔다. 다문화가 주요 테마인 기숙사에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크리스찬이라는 친구를 처음 보았다. 1학년 새내기였던 그와의 첫만남이 선하다. 자전거를 끌고 부모님과 함께 내가 머무는 기숙사방에 들어왔다. 한국의 아이돌 엑소(EXO)를 좋아하고 고등학교 시절 소외된 한국인 유학생들을 도와준 경험이 있는 탓에, 그는 한국인을 유독 좋아했다. 같은 방을 쓰면서 나를 살뜰히도 챙겼다.


우리의 대화 주제는 언제나 사회적인 문제들이었다. 보수적인 텍사스에서 기독교 정신과 난민은 언제나 뜨거운 감자였다. 크리스찬은 이름에서 보이는 것처럼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언제나 페이스북에서 할머니와 기독교 정신에 대해 댓글 전쟁을 하곤 했다. '미국은 하나님의 나라이므로 난민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할머니에게 '하나님의 나라라면 난민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맞선 것이다.


어느날은 댈러스의 거리를 함게 걷다가 그와 그의 부모님과 퀴어 퍼레이드를 맞닥뜨렸다. 퀴어 퍼레이드를 부정적으로 보는 독실한 부모님과는 자신의 뜻이 다르다고, 크리스찬이 속삭여주던 것이 생각난다. 동시에 그와 부모님은 방학 시기마다 아이티에 가서 봉사를 했다. 자신의 생일에는 친구들에게 선물 대신 그 의료 단체 기부를 받았다 (그런 그를 보고 나도 몇 년 뒤 생일에 한 번 따라해봤던 기억이 난다)


그와 나는 죽이 잘 맞았다. 기숙사방에서, 파티에서, 학교 문화 행사에서 우리는 틈만 나면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그때 나는 학교 수업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영어를 못했는데, 크리스찬과 이야기한 덕에 그나마 긴 영어 문장도 더듬거리면서 구사할 수 있게 됐다. 크리스찬은 내가 잘 알지 못했던 인종주의,세계 전쟁, 난민 문제에 대해 성심성의껏 알려주었다. 나의 시사에 관한 세계관이 한국의 틀 안에서 전 세계로 퍼져나갔던 계기였다.


볼리비아에 갔을 때부터 크리스찬과 가까운 아메리카 사이드에 갔다는 사실에 설렜다. 그에게 언젠가 텍사스에 갈 것이라고 엄포해놨던 상황이었다. "너 아직도 휴가마다 아이티에 가서 의료 봉사를 해?" 그는 내게 이렇게 답했다. "나는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것들에 가치를 두고 있지는 않아. 나의 중심 세계관이 많이 바뀌었어." 그가 결혼을 했기에 당연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텍사스에 가는 일정을 세밀하게 조율하면서부터 그가 한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 "나 휴스턴에 도착하는데 혹시 댈러스에서 와줄 수 있어?" "나는 몸이 예전과 같지 않아. 그래서 이제는 그렇게 장거리 이동을 하기 어려워. 다음에 보자." "아니야, 그럼 우리 댈러스와 휴스턴 중간에서 보자. 우리가 같이 공부했던 웨이코에 베일러대를 가면 어때?" "그래" 그는 자신이 4년 전부터 경험한 원인 불명의 병명을 알려주었다. "나 12시부터 7시까지 가능한데 같이 볼래?" "나는 그렇게 오랜 시간 밖에 머무는 것이 이제 어려워. 4시간 정도가 좋을 것 같아."


그를 만나기 전에는, '내가 텍사스까지 가는데, 댈러스에서 휴스턴을 못 와주나! 왜 이렇게 나랑 짧게 있으려 하지?'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를 만나고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그를 댈러스에서 웨이코로 불러냈다는 사실이 더욱 미안해졌다. 크리스찬의 상태는 생각보다 더욱 심각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뇌인지 기능과 심장 기능과 신경계가 연결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근육의 섬유 조직들은 약화되어서 서있으면 아래에 쏠린 피가 위로 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5분 이상 서있지 못하며, 서있을 경우 심장 박동수가 130을 넘어갈 정도로 치솟는다. 산책을 해야 하는 경우를 대비해 거치대도 가지고 다닌다. 더위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쉽게 경험하는 편이며, 가방 속에는 갖가지 종류의 약을 가지고 다니면서 여러 이상반응과 알러지에 대응해야 한다.


"나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일상을 살 수 없게 됐어" 나에게 세계를 보여줬던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 남편이 일을 하는 덕분에 그는 일을 그만둬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했다. 대신 매일 집 안 소파에 앉아있어야 한다고 한다. 주로 티비를 보거나 게임을 하는 것이 일상이다. 그는 지난 10년 간 내게 어떻게 지냈는지 물었다. 내가 어떻게, 너가 보여준 세계 덕분에 세계를 돌아다녔다고 말할 수 있을까. 평소라면 나의 커리어에 대해 한심하게도 자랑스럽다는 듯이 여러 이야기를 늘어놓는 나였다. 오늘만큼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걸어다니지 못했기에 우리는 4시간 동안 식당과 카페를 갔고 드라이브를 했다. 10년 만에 만났는데도 우리는 죽이 잘 맞았다. 크리스찬은 내가 떠나고 난 뒤의 대학생활에 대해 알려주었다. 다이닝홀, 카페, 피자 딜리버리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했다. 특히나 다이닝홀에서는 흑인 친구들을 다수 동료로 뒀는데 일대일로 개별적으로 교류핯 때와는 달리 집단 문화를 경험했고, 그 이후 좀더 흑인의 집단적 정서에 대해 자세히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웨이코가 매스컴에 오르면서 '범죄율과 빈곤율이 높은 도시'에서 '관광 도시'로 변모했다는 것도 알려줬다. 우리의 당시 관심사였던 공공주택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웨이코가 관광 산업화되면서 공공주택은 민영 상업시설로 바뀌었다. 젠트리피케이션의 폐해였다. 부유한 관광객들과 더불어 베일러대학생들이 그들만의 상권을 넓혀가며 물가를 높이면서 마을 사람들의 생활권을 침범했다고 했다. 상권 외곽에서 피자 딜리버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깨달은 사실이라고 한다. 흑인들을 마녀사냥해서 린치했던 메모리얼이 웨이코에 있다는 사실도 알려줬다.


팔레스타인과 미국의 이민자 색출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는 짧게 언급했다. 서로의 입장을 알았기에 긴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지금 미국 사회에서 이런 주제는 금기어가 됐어. 그렇지만 나는 이럴 때일수록 더 견고하게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해." '사회 문제에는 이제 관심 없다며, 이 자식아ㅠㅠ' 속으로 생각했다. 아직도 총명하고 반짝이는 그의 눈망울을 보면서 마음 한켠이 찡해졌다.


크리스찬에게 헤어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미션 웨이코라는 선교원 옆을 드라이브 하자고 졸랐다.


나와 크리스찬은 각기 다른 시기에 여기서 주최하는 poverty simulation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가진 소지품을 모두 맡기고 현지 노숙인들과 같은 생활비로 길바닥에서 2박3일을 나는 프로그램이다. 노숙인들이방문하는 중고옷 가게에 가서 옷을 고르고, 생계 유지 수단인 쓰레기 줍기도 하고, 교회에 가서 점심밥을 얻어먹기도 한다. 그러다가 진짜 노숙인들과 대화를 나눴을 때, 같은 팀 사람이 말실수를 해서 혼나기도 했다. 야외에서 침낭에 들어가 잠을 자기 직전 우리는 선교원 목사님으로부터 세계 가난에 대해서 배웠다. 그때 처음 봤던 아동 노동에 대한 비디오는 잊히지 않는다. 그 비디오로 처음 개발도상국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국제개발협력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목사님은 너무나도 멋있는 분이셨다. 동생이 노숙인인데 동생을 바꾸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노숙인을 대하는 마을 공동체의 태도를 바꾸기로 결심했다. 여러 센터와 프로그램을 만드셨다. 그중 하나가 시민들이 노숙인과 가난에 대해 이해하도록 돕는 프로그램이었던 것이다. 그는 길거리 다리 밑에서 예배를 열어 노숙인들이 참여할 수 있게 했다. 크리스마스 때마다 마을 사람들에게 선물을 걷어 빈곤 가정 아이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공정 무역을 하는 커피숍을 열었고, 노숙인을 대상으로 하는 중고 옷 가게도 열었다.


역시나 크리스찬은 마을의 변천사를 알고 있었다. 내가 떠난 뒤에 미션 웨이코에서 새로 만들었다는 식료품점도 보여주었다. "food desert라는 개념 기억나? 웨이코가 food desert잖아. 그래서 미션 웨이코에서 할인된 가격에 건강한 식재료를 파는 식료품 가게를 여기에 열었어."


어느덧 크리스찬과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나는 어떤 말을 골라야 할지 몰랐다. 크리스찬이 좀더 교외로 이사를 가서 말과 소를 키우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말과 소를 입양하면 알려달라고 했다. 그리고 바보같게도, 인스타그램을 더 자주해달라고 했다. 그는 인스타그램에 사회적인 이슈들을 공유하고 논평하곤 했으니까. 묘하게 동료애를 느꼈었다. "맞아, 3-4개월 동안 인스타그램을 못했어, 건강 때문에" 그가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알지, 그래도 언젠가..." 내가 말 끝을 흐렸다. "응, 곧 돌아갈 거야!" 그가 답했다.


볼리비아로 나를 이끈 것은 웨이코였구나. 그리고 크리스찬이었구나. 이 모든 것이 너로 인한 것이었는데 나는 언제나 나의 능력치만 재단하기에 급급했다. 텍사스는 앞으로 종종 와야겠다. 나도 곧 돌아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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