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 비디오여행

아버지의 영화 취향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 외에도 우리 집에는 또 하나의 전통 의례가 있다. 바로 일요일 낮마다 '출발! 비디오 여행'을 보는 것이다. 30년 동안 매주 반복된 의례이니 생각해보면 특이한 것 같기도 하다. 이것이 우리 집만의 특별한 전통인지, 아니면 다른 집들도 비슷한지 모르겠다.


나는 으레 모든 아버지들이 영화광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른이 되어보니 아버지만큼 영화를 자주, 많이 보는 사람은 찾지 못했다. 일주일에도 수번씩 틈만 나면 어머니와 아버지는 거실에서 불을 꺼놓고 영화를 함께 보신다. 이렇게 적으면서 생각해보니 어머니는 아버지의 취향을 잘 따라주시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두 분이 잘 어울리는 거구나.


영화를 많이 아는 아버지가 있으면 좋은 점이 있다. 내가 인상 깊게 본 영화에 대해 말하면 즉석에서 해설을 주신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다른 친구들이라면 지루하다고 느낄 예술 영화들을 같이 봐주었다. 20대 초반, 언젠가는 스탠리 큐브릭을 좋아하는 어떤 사람과 가까이 지냈다. 그래서 나도 그의 영화들에 빠져지냈던 적이 있다. 그중 하나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였다. 그런데 영화가 3시간에 가깝고 다소 컷들이 지루하게 넘어가다 보니 나와 함께 그 영화를 봐줄 사람이 없었다. 안양에 살 적에 아버지와 함께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함께 감상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아버지도 보시다가 잠에 드시기는 했다. 또 어떤 때는 내가 왕가위 감독 영화에 빠졌었던 기억이 난다. 마찬가지로 동사서독이 다소 난해한 측면이 있어서 같이 볼 사람을 찾지 못했다. 이건 사당에 살 때였나? 아버지가 기꺼이 거실에서 동사서독을 같이 봐주셨던 기억이 난다. 스페이스 오디세이도, 동사서독도 덕분에 완주할 수 있었고, 이후로 나 혼자서도 세 네 번을 볼 수 있었다.


사실 고백하자면 나는 아버지와 같은 사람은 절대 만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왔다. ㅠㅠ 아버지가 이 글을 보면 상처받을까? 여러 이유가 있는 자기 부정과도 같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어떤 때는 아버지와 같이 영화를 보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해줄 사람을 꿈꿔오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아버지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아버지에게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물었다. 줄줄이 일곱 개의 영화가 나왔다. 어릴 때는 포세이돈 어드벤처, 예술 영화 중에는 안개 속의 풍경, 보고 나서 가장 먹먹했던 영화는 A.I., 그리고 순수의 시대와 동사서독은 다섯 번 이상 봤다고 한다. 아버지도 동사서독을 좋아하셨구나! 나와 본 것은 아마 예닐곱 번째쯤 됐을 거라 생각하니 그것 또한 재밌었다. 애니매이션 중에 가장 좋아했던 영화는 월-E이며, 종합적으로 가장 좋아했던 영화는 대부 1편이라고 한다.


아버지가 생각날 때마다 하나씩 꺼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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