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만에 다시 돌아온 볼리비아
얼마 전 직장 동료들과 술자리를 하던 중, 자연스레 경제 위기 이야기가 나왔다.
“한국도 예전에 큰 경제 위기를 겪었잖아? 그땐 어떻게 했어?”
나는 짧게 대답했다.
“우린… 금을 모았어.”
그 이상은 덧붙이지 않았다. 선진국에서 온 내가, 괜히 경험을 들먹이며 위계를 세우는 듯한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때의 풍경이 선명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전국 곳곳에서 사람들이 장롱 속 결혼반지와 돌반지를 꺼내 은행 창구에 내놓던 모습. 그것은 단순한 경제 조치가 아니라, 절박함이 만들어낸 집단 행동이었다.
그런데 내가 사는 볼리비아 도심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거짓 하나 없이, 매주마다 어김없이 북소리가 울린다. 창밖을 내다보면 화려한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춤을 추며 거리를 행진한다. 이번 주는 대학생들의 축제, 지난주는 볼리비아 200주년 기념 축제였다. 명분은 매번 다르지만 행렬의 모습은 비슷하다. 웃음과 음악이 거리를 가득 메우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생각이 든다. “나라 경제가 침몰하는 상황인데, 이렇게 축제에 돈을 써도 괜찮은 걸까?”―실제 볼리비아는 축제 참여에 적게는 두 달치 월급, 많게는 일년치 연봉을 대출로 소비하는 나라다.
그 사이 대선이 불과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선거가 과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최근 내가 가장 주목한 것은 후보들의 경제 공약이었다. 대선 토론회에 가면 ‘자유 시장 경제 도입’이라는 말이 너무나도 자주 나왔다. 나는 불안했다. 산업 기반이 약한 경제는 무분별한 개방에 쉽게 흔들린다. 보통은 수입 대체 산업을 키우고, 일정 수준까지 수출 지향 모델을 다듬은 뒤, 단계적으로 시장을 열며 보조금과 관세로 정교하게 조율해야 한다. 그런데도 주요 후보들은 줄곧 시장 개방을 강조했다.
그러던 중, 직장 동료가 귀띔했다.
“다음 정부가 IMF에 돈을 빌릴 수도 있다더라”
그 순간, 퍼즐이 맞춰졌다. 왜 후보들이 앞다투어 시장 개방을 1순위 공약으로 내세웠는지 이해됐다. IMF 차입은 정부에 엄청난 정치적 부담이다. 한국의 사례만 봐도 그렇다. IMF가 개입하는 순간부터 ‘외세의 간섭’이라는 프레임이 순식간에 형성된다. 특히 이 나라는, 그러한 프레임 속에서 사회주의 정권이 20년을 집권한 곳이다. 그렇기에 후보들이 시장 개방을 ‘우리 스스로의 선택’처럼 미리 포장하는 게 아닐까. IMF가 요구할 개방 조건을 국민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만들려는 셈이다.
실제로 로이터 또한 지난 8일 이를 인식한 기사를 출고했다. 국제 투자자들이 볼리비아의 IMF 차입 가능성을 두고 국채에 투자했다고 분석한 것이다. 최근 볼리비아 국채는 대선을 앞두고 30% 이상 상승하며 JPMorgan 신흥시장 채권 지수에서 상위권 수익률을 기록했다고 한다. 로이터는 이를 두고 정치적 반전으로 IMF 프로그램이 길을 닦을 거라는 투자자들의 기대감이 반영된 결과라고 분석했다. 시티그룹은 볼리비아 채권의 등급을 '비중 축소'에서 '유지'로 변경했다고 한다.
물론 나는 대학원 시절, 국제개발 담론에서 IMF의 역할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교수님 밑에서 공부했다. 워싱턴 컨센서스의 폐해, 그리고 개발도상국의 미국 경제 종속과 같은 이야기가 수업의 주된 내용이었다. 그래서 볼리비아가 IMF에 손을 빌려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은 걱정 반, 기대 반일 뿐이다.
그저 볼리비아가 대선을 잘 치르고, 건설적인 경제 정책을 제시할 대통령을 맞이하길 바란다. 그리고 부디, 춤을 조금만 덜 추기를. 한국처럼 금을 모으는 분위기가 형성되면 좋겠지만, 부정부패라는 현실을 잘 알기에 차마 그 말을 꺼낼 수 없다. 나는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볼 뿐이다.